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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3·1운동 알린 첫 외신 보도 中 ‘차이나 프레스’ 지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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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3·1운동 알린 첫 외신 보도 中 ‘차이나 프레스’ 지면 찾았다

유원모 기자 입력 2019-02-19 03:00수정 2019-02-1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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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한시준 교수 상하이 도서관서 확인
크게보기3·1운동 소식을 해외 언론 중 가장 먼저 알린 차이나프레스(대륙보)의 1919년 3월 4일, 8일, 11일, 15일자 지면(왼쪽부터). 상하이시립도서관에서 신문 원본을 확인한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11일자와 15일자에 평화와 자주 독립을 염원한 3·1 독립선언서 내용이 소개돼 있다”며 “당시 민족대표 측으로부터 외교통신 업무를 맡은 현순 목사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 제공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을 만세의 울림으로 물들게 한 3·1운동 소식을 해외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보도한 중국 영문 일간지 ‘차이나 프레스(대륙보)’의 1919년 3월 4일자 1면 지면이 처음 확인됐다. 차이나 프레스는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시발점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기사 원문을 확인하지 못해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상하이시립도서관 문서보관소에서 소장 중인 1919년 ‘차이나 프레스’의 원본 사진을 18일 본보에 공개했다. 한 교수는 “첫 보도가 나온 1919년 3월 4일 보도를 포함해 8일자, 11일자, 15일자 등 3·1운동 소식을 보도한 차이나 프레스의 나흘 치 신문 원문을 지난해 12월 상하이시립도서관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해외 여러 언론사 가운데 중국 상하이의 차이나 프레스에 3·1운동 소식이 처음으로 실린 배경에는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1880∼1968)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국내를 넘어 해외 곳곳에 3·1운동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현 목사의 여정을 소개한다.


○ “상하이로 가 민족의 거사를 알려라”

3·1운동이 발생하기 일주일여 전인 2월 19일. 기독교 인사들은 남대문역(현 서울역) 근처에 있던 제중원의 약방주임 이갑성의 사저에 모인다.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이 시작한 2·8독립선언,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당 등에서 추진하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 “국내에서도 거국일치적 운동을 반드시 일으켜야 한다”는 결정을 이 자리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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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사들은 3·1운동에 대한 조직적인 준비에 나선다. 이들은 해외 동포들에게 3·1운동 소식을 알릴 외교·통신 담당으로 현 목사를 임명한다. 이 소식을 접한 천도교 측 최린은 현 목사에게 경비 2000원을 지원하며 “만주의 봉천(펑톈·현 선양)으로 가서 최창식을 만나 동행할 것”을 주문한다. 당시 최린이 이끌던 민족대표 측은 이미 독립선언서 초안을 완성해 둔 상태였다.

2월 24일 아내에게만 작별을 고한 현 목사는 용산역에서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틀이 지난 26일이 돼서야 중국 봉천에서 천도교 인사인 최창식을 만난다. 최창식은 최린으로부터 미리 전달받은 3·1독립선언서의 초안을 필사해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행선지는 중국 상하이. 기나긴 시간을 철로에 몸을 실은 끝에 3월 1일이 돼서야 도착했다. 다음 날인 2일 밤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의 신규식 이광수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펼쳐 보였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합친 순간이었다.

3월 4일 드디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에 3·1운동 보도가 실렸다. “서울의 소요 사태 전국에서도 확대”라는 제목과 함께 1면에 배치된 것. 현 목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신 격인 독립임시사무소를 이날 바로 설치하고, 자신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국가인 프랑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 대표들에게 전보로 발송한다. 당시 한국인 신분으로는 국내 잠입이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해 상대적으로 출입이 자유로운 영국의 한 기자에게 3·1운동의 현장 취재를 부탁하기도 한다.


○ 외신 “품위 있는 독립선언서”

현 목사의 계획은 그대로 실현됐다. 4일자 보도 이후 8일자 차이나 프레스 1면에서도 “조직된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한국의 봉기”라는 제목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 북화첩보(北華捷報)와 중국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民國日報) 등 중국의 대다수 언론들이 보도 행렬에 합류했다. 11일자 차이나 프레스에는 “사태 발생 이후부터 기독교인 중심 3500명이 체포돼”라는 부제로 기사가 실려 있어 기독교 인사인 현 목사가 해외 공보활동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15일자에는 현 목사가 접촉한 영국 기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한반도를 취재하고 온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해당 기사는 당시 우리 민족의 품격과 저력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본 당국이 공식 발표했던 일반적 시위 수준을 훨씬 넘는 것으로 계급을 불문하고 거국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는 한국이 모든 국제권리에 의거해 자주국이며 4000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일어나 독립을 위해 평화 시위를 하라고 촉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 선언서는 위엄이 있고 힘차며, 선언서에 묘사된 한국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모는 공분을 일으킨다.”

이후 현 목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위원, 내무차장과 구미위원부 위원으로도 활약하며 조국이 광복할 때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한 교수는 “3·1운동의 소식을 세계 각국에 알리고자 했던 민족대표들의 노력이 증명된 사료”라며 “아직까지 현 목사가 여러 나라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선언서 원문 등이 발견되지 않아 이 문서들을 찾는 것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우리 학계의 과제”라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3·1운동#차이나 프레스#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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