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사랑하는 취준생 그녀에게…“‘아무튼 레즈비언’ 책 내는 건 어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2일 16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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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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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인 그(여성)는 오늘도 묻는다. “언니, 난 뭘 잘 하는 것 같아?” “음, 사랑?”

그렇다. 그는 타고난 사랑꾼이다. 지금껏 그가 만난 여자만 해도 한 명, 두 명…. 아, 여기서 ‘여자’는 오타가 아니다. 2019년에는 여자가 여자랑 연애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을 레즈비언이라고 하는데 성적 지향 얘기는 뒤로 하고, 사랑꾼인 그 때문에 나는 가끔 곤란하다. 애인이 생길 때마다 소개해준 덕에 그렇게 친구가 된 사람이 한 명, 두 명…….

하지만 그걸 자기소개서에 쓸 순 없다. 그 다음으로 잘하는 걸 떠올려 본다. 글쓰기. 그는 고고학자 같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에서 지난 사랑이 남긴 흔적을 찾아낸다. 첫 사랑이 결혼하던 날 블로그에 썼던 글을 보며 ‘수지타산이 안 맞는 마음을 간직하고 지점토 굴리듯 조금씩 키워나가는 취미가 있다’는 그의 진짜 자소서를 보며 생각했다.

“가장 잘하는 게 사랑이고, 그 다음 잘하는 게 글쓰기라면,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게 가장 빨리 성공하는 길이 아닐까? 언론사 취업보다.” 그는 솔깃해하면서도 실명으로 책을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주춤했다. “필명으로 ‘아무튼 시리즈’ 어때? ‘아무튼, 레즈비언’으로 내는 거야!” 아무튼 시리즈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를 소재로 애정하는 한 가지에 관한 에세이다. ‘아무튼, 택시’부터 ‘아무튼, 스웨터’까지 다양하고 계속 신간이 나오고 있다.

“팔릴까?” “야,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 작년에 대박난 거 몰라? 퀴어(성 소수자) 소설이 대세라고!” 그 자리에서 나는 출판사에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제 친구가 아무튼 시리즈에서 레즈비언 편을 쓰면 정말 잘 할 것 같은데, 혹시 안 팔릴까요?” “아… 그건 알 수 없어요. 기대했던 책이 반응이 없을 때도 있고, 그 반대도 많거든요. 우선 200자 원고지 20매 정도의 글을 세 편, 구성안과 함께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친구는 한 달이 지나도록 쓰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과소평가하고 연애에만 몰두하고 있는 친구가 답답해, 그럼 내가 하겠다고, 너보다 내가 먼저 책을 내겠다고 도발했다. 마침 하고 싶은 이야기도 생각나서 손가락이 불타올랐다. 이제 마감만 있으면 된다. 인스타그램에 ‘아무튼 시리즈 투고를 목적으로 세 편의 글을 함께 쓸 동료를 구합니다’라고 올리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였다. 중국 유학 간 사촌동생부터 술의 힘을 자주 빌리는 애주가까지. 다들 이렇게 사랑하는 게 많았다.

“나는 ‘아무튼, 파자마’ 할래!” “파자마?” “사람들이 파자마의 매력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위아래 세트로 갖춰 입고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게요!” 하지만 그는 이내 포기했다. “돈이 없어서 파자마가 몇 개 없거든… 유니클로와 무인양품만으로 쓸 말이 있을까” 이 언니 생일선물은 파자마다. 우리 목표는 벚꽃이 피기 전까지 세 편을 쓰는 것이다. 출판사에서 e메일이 왔다. ‘투고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잠시 설레 본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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