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려도 안 열려” 자포자기…서울대생이 ‘아가리 취준생’ 된 사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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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일자리를/청년이라 죄송합니다]1부 ‘노오력’의 배신
<1> 나는 ‘아가리 취준생’이다

그래픽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친구들은 저를 ‘아가리 취준생’이라고 불러요.”

서울대생 정유철(가명·26) 씨는 3일 첫 만남에서 뜻 모를 용어부터 꺼냈다. 아가리(입의 비속어)에 취업준비생(취준생)이 합쳐진 오늘날 한국 청년의 신조어였다. 취업에 자포자기한 상태가 됐지만 부모의 기대와 주변 지인들의 시선 때문에 “나 지금 취업 준비 중이야” “○○그룹 원서 냈어”라며 마지못해 거짓말을 하는 취준생을 뜻한다.

2011학번인 정 씨는 11학기째이지만 그 흔한 자기소개서 한 번 써 보지 않았다. 공기업, 대기업 입사 준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취업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상 ‘취포생’(취업포기생). 또 다른 이름은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14년 보고서를 보면 국내 대학 졸업자 4명 중 1명(24.4%)이 ‘니트족’이다. OECD 평균(13%)의 약 2배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별다른 이유 없이 이들을 ‘사회 부적응자’ ‘꿈 없는 청춘’으로 부를 뿐, 이들이 ‘왜 취업을 포기하는지’에 대해 주시하지 않는다. 취재팀이 3, 4월 전국 대학가와 서울 노량진, 신림동 고시촌에서 구직 포기 경험이 있는 청년 10여 명을 찾은 이유다. 전문가들과 함께 이들의 심리 경로를 추적해 취업 의지를 잃어가는 과정을 탐색했다.
 

○ “高스펙에도 줄줄이 좌절… 면접 트라우마까지”

박도성(가명·28·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씨는 오늘도 엄마에게서 오는 전화가 부담스럽다. 박 씨 어머니는 요즘 각종 취업사이트를 직접 접속한다. 아들에게 전화해 “내일 모레 LG그룹 마감인데 원서 썼느냐”고 묻는다.

이때마다 박 씨는 짜증을 참기 힘들다. “그런 걸 물어보면 나중에 ‘저 떨어졌어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어떨 거 같아요”라며 거칠게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9월부터 지금까지 어떤 곳에도 입사원서를 내지 않았다. ‘원서 넣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면 부모님께 죄책감이 생긴다.

박 씨도 ‘아가리 취준생’이다. 취준생 사이에서는 원시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빗대 ‘입’만 진화했다는 ‘오랄로피테쿠스(ORAL-opithecus)’라고도 불린다. 그는 식어 버린 열정이 되돌아오지 않음을 느낀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국외대 앞에 사는 박 씨는 예능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오전 3시까지 본 후 오후 1시경에 일어나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고 PC방에 가거나 술을 마시는 생활을 7개월째 지속했다. 학교 도서관에는 가지만 취업 공부에 열중하진 않았다. 한 달 생활비(50만 원)는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메운다.

그는 ‘노오력’을 안 했을까. 아니다. 2011년 중국의 베이징외국어대, 2014년 필리핀에서 외국어 실력을 갈고닦았다. 3학점을 남겨둔 채 졸업을 미루며 취업 준비를 시작한 2014년 2학기 당시 토익 스피킹 레벨7, 중국어능력시험(HSK) 최고 등급 6급 등을 갖췄다. 하지만 정작 취직은 낙방의 연속이었다. 2016년 상반기까지 삼성, LG, 두산 같은 대기업 등 30여 곳에서 서류 통과조차 어려웠다. 면접까지 간 곳은 2곳. 결과는 ‘면접 트라우마’까지 생긴 자신이었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 지난해 8월 졸업한 박 씨는 토익 스피킹, HSK 점수 기한도 만료돼 다시 시험을 봐야 했다. 모든 것을 ‘리셋’하고 다시 취업 준비를 하려니 엄두가 안 났다. 그가 더 이상 입사원서를 내지 않는 이유다.
 

○ “최저 시급에 익숙… 알바나 하며 살까봐요”


김진선(가명·26·이화여대 국문과) 씨는 ‘문송합니다’(문과라 죄송합니다)를 극복하려고 토익 만점, 오픽(OPIc) IH등급 등 스펙 쌓기에 몰두했다. 10년 이상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현재 그는 “난 이미 경쟁에서 뒤처졌다”고 자조한다.

자신감이 처음 줄어든 것은 2014년. 기업 인턴에 도전하면서부터. 수십 곳에 지원했지만 서류 통과조차 불가능했다. 자취 비용을 마련해야 했던 김 씨는 그해 4월부터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를 병행했다. 오후 8시에 출근해서 오전 2∼4시 매표, 청소를 하고 낮에는 영어학원을 다녔다. 체력적으로 힘들어 제대로 된 취업 준비가 불가능했다.

2015년 김 씨는 다행히 한 회사 인턴에 합격했지만 그것이 취업 의욕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단순 업무에, 일하는 체계도 부족해 배울 게 없었다. 사무실 내 주방에서 설거지부터 밥까지 김 씨가 해야 했다. 함께 입사한 인턴은 ‘아프다’며 바로 그만뒀다. 이후에도 김 씨는 학업과 CGV 알바를 병행하며 입사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어느 순간 자소서를 쓰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있는 집’ 친구들은 열정페이로 일할 수 있지만 저는 인턴 월급 50만 원으로는 생활이 안 돼요. 알바를 병행하는 학생은 취업 경쟁에서 뒤처지죠. 그냥 알바나 하면서 살까 해요. 이미 ‘최저시급’에 익숙해졌어요. ‘기대치를 낮추는 것’도 노력이에요.”

김 씨가 취업 의지를 잃게 되는 과정에는 등록금, 과도한 스펙 비용에 찌든 청년의 일상이 담겨 있다. 눈높이를 낮춰 들어간 첫 직장의 저임금, 낮은 복지수준 등 열악한 노동 여건에 지쳐 심신이 소진돼 취업 의지가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 “라면국 먹어가며 300곳 넘게 원서 썼지만…”

한국 청년 중 상당수는 취업 시도→좌절→니트 상태→재도전→좌절→니트 상태를 반복하다 최후의 보류인 ‘9급 공무원’에 도전하면서 ‘장기지속형 니트’가 된다.

최준석(가명·33·중앙대 사회학과 졸업) 씨는 아직 ‘라면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전 7시에 눈뜨자마자 채용사이트 속 취업공고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자소서를 쓸 때면 자주 ‘라면국’을 먹었다. 라면 끓일 때 수프를 조금 남겨놨다가 이후 물에 풀고 밥을 넣으면 라면국이 된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그렇게 300곳 넘게 원서를 넣었지만 모두 떨어진 뒤 자연스레 구직을 포기하게 됐다.

집에 생활비를 보태 달라고 하기 어렵다 보니 액화석유가스(LPG) 충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고 돈이 쌓이면 취업전선에 나서는 생활을 수년간 반복했다. 2014년에는 간신히 정부 취업지원패키지 프로그램으로 생애 처음으로 리서치 회사 인턴이 됐다. 정규직 전환도 가능하단 말에 ‘쨍하고 해뜰’ 날이 올 줄 알았다. 희망은 최 씨를 더 아프게 했다. 3일 만에 단순 업무만 하는 자신의 정규직 전환은 불가능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결국 노량진을 찾았다. 8일 국가공무원 9급 공채 필기시험에서 4910명 선발에 역대 최대인 17만2747명이 몰렸다.

서울대생 정 씨의 심리를 분석해보니 ‘아가리 취준생’이 된 원인은 취업 경쟁 스트레스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014년 3월 군 전역 후 복학한 학교에서 1, 2학년 때부터 각별했던 학교 친구들과 괴리감이 커진 게 그 계기였다. 친구들은 저마다 대기업 등 좋은 직장이 관심사였고 취업 전쟁에 몰두했다.

그럴수록 정 씨는 취업과는 무관한 커피 바리스타, 칵테일 조주사 등을 홀로 공부했다. 정 씨는 취업 생각이 없지만 친구, 부모, 친척에게 “하반기에 취업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취업 경쟁에 환멸을 느끼거나 사회 진출에 공포심을 가지는 현상을 ‘니트 증후군’으로 규정했다. “니트 증후군’이 20대의 의식, 나아가 청년문화 전반에 번지고 있다.”(정연순 한국고용정보원 고용서비스전략본부장)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가 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원인입니다. 중소기업 입사 후 실력을 쌓아 대기업으로 점프할 수 있는 패자부활전이 정착돼야 합니다.”(이규용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특별취재팀 ::

△정책사회부=김윤종 유성열 기자
△산업부=김도형 기자
△경제부=주애진 기자
△국제부=김수연 한기재 기자
△사회부=김배중 김동혁 최지선 위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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