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파도는 나쁜 남자 같아”… 양양엔 지금 女서퍼 물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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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이 서핑에 빠져드는 이유

김수영 씨(왼쪽)와 박보현 씨가 16일 강원 양양 죽도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씨와 박 씨는 2년 전만 해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서핑을 하다 친해져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가 됐다. 두 명은 사진을 찍는 중에도 “지금 파도가 좋아 빨리 타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양양=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김수영 씨(왼쪽)와 박보현 씨가 16일 강원 양양 죽도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씨와 박 씨는 2년 전만 해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서핑을 하다 친해져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가 됐다. 두 명은 사진을 찍는 중에도 “지금 파도가 좋아 빨리 타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양양=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좋아하는 뭔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것이 서핑이라면 가능하다는 여성들이 있다. 박보현 씨(35)는 지난해까지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2011년 휴가 때 강원도 양양을 찾은 게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재미있다는 친한 동생의 권유로 서핑을 처음 해봤는데 별다른 재미도 없고 파도를 기다리기만 해야 했지만 이상하게 빠져들었다. 이후 휴가는 바다로 갔다. 겨울에는 인도네시아 발리 등 해외로 가서 서핑을 즐겼다. 주말에도 차를 몰고 바다로 떠났다.

지난해 6월 박 씨는 결단을 내렸다. 회사에 사직서를 낸 것이다. 언제든지 서핑을 하기 위해 양양에 새로운 터전을 꾸리기로 했다. 당연히 주위에서는 말렸다. “서핑을 취미로 하는 것은 좋지만 직장까지 그만두고 매일 서핑을 하면 생활이 돼버린다. 취미와 생활은 다르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올 5월에 양양 죽도해변 근처에 집을 마련한 박 씨는 현재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일이 끝나는 오후 3시면 어김없이 바다로 나간다. 수입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었지만 서핑이 있어 행복했다. 박 씨는 “회사를 그만둔 것에 후회는 없다. 금전적으로 힘들 수도 있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웃었다. 서핑은 그에게 평생의 반려자도 선물했다. 물을 잘 타는 남성과 5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양양의 죽도해변은 3, 4년 전부터 서핑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죽도해변은 특히 여성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곳 특유의 분위기가 여성 서퍼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가족 단위의 피서객이 많은 다른 해변과는 달랐다. 해변 하면 연상되는 횟집과 모텔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대신 ‘여기 한국 맞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국적인 분위기의 가게들이 즐비했다. 발리나 미국 하와이의 상점들을 옮겨놓은 듯한 서핑숍과 레스토랑, 카페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반바지를 입고 맨발로 거리를 걷는 사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여유롭게 도로를 질주하는 사람, 비키니를 입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여성 등 국내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서핑 강습과 장비 대여를 하는 ‘타일러서프숍’의 김종후 사장(44)은 “최근 서핑을 하려는 여성이 많이 늘었다. 손님 10명 중 7, 8명은 여성이다”라고 말했다. 2, 3년 전만 해도 남성들이 많이 찾았지만 이제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전했다. 실제로 16일 죽도 바다에는 서핑을 즐기는 50여 명의 서퍼가 있었는데 파도에 몸을 맡기며 둥실둥실 떠 있는 서퍼들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김 사장은 “예전에는 남자친구를 따라온 여성이 대부분이었다면 최근에는 혼자 오거나 동성 친구 2, 3명과 함께 오는 여성이 많아졌다. 오히려 남성들끼리 오는 경우는 줄었다”고 전했다.

보석 디자이너인 신소희 씨(28)도 매주 양양을 찾는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수영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휴양지에서 접한 서핑에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서핑 동영상을 보고 곧바로 제주도를 찾았다. 일주일간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서핑에 매달렸다. 신 씨는 이후 주말마다 양양으로 차를 몰았다. 구입한 지 3년 된 자동차는 벌써 운행 거리가 9만 km가 넘었다. 신 씨는 “그동안 왜 서핑을 몰랐는지, 진작 용기를 내볼걸 하고 후회했다. 운동신경이 없어 제대로 된 운동을 못했는데 서핑은 달랐다”고 말했다.

서핑은 여성에게 특별히 불리한 점이 없는 스포츠다. 근력보다는 균형감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초반에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빨리 배운다. 박보현 씨는 “남성들은 어떻게 하면 서핑을 빨리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탄다. 그러다 보니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 쉽게 지치고 몇 번 타다 잘 안되면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여성들은 빨리 잘 타려고 하기보다 그 분위기를 즐긴다. ‘잘 타지 못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접근법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서핑의 ‘나쁜 남자’ 같은 매력도 여성들을 사로잡는다. 여성들은 착한 남성보다는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는 남성에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2009년 서핑을 시작한 김수영 씨(30)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스노보드 선수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인턴으로 활동했고 대기업에서 스포츠마케팅 관련 일을 했던 김 씨는 2009년 하와이로 휴가를 갔다가 서핑을 경험하고 인생의 진로를 ‘180도’ 바꿨다. 서핑을 하면서 계속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았다. 최근 적극적으로 서핑용품 시장 공략에 나선 스포츠 용품 브랜드인 파타고니아에 취직한 김 씨는 양양에 일주일에 사흘 이상을 머물며 서핑 캠페인과 이벤트 등을 진행하고 있다. 여름이면 양양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서핑과 일을 즐기고 있다.

스노보드와 서핑 둘 다 경험해 본 김 씨는 “서핑은 사람을 안달 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눈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슬로프는 한번 지어놓으면 아침이나 저녁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탈 수 있다. 하지만 서핑은 파도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 어떤 파도가 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좀 더 매달리게 되는 것 같다”며 웃었다. 신소희 씨도 “서핑을 즐기는 친구들끼리 서핑은 ‘나쁜 남자’ 같다는 말을 한다. 파도가 오지 않을 때는 정말 하염없이 미워지다가 좋은 파도가 와서 라이딩을 하면 미움이 고마움으로 바뀐다. 어느새 다시 바다로 나가는 나를 발견한다”고 전했다.

독특한 서핑 문화도 여성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양양 죽도해변에 위치한 10여 개의 서핑숍은 다양한 개성이 넘쳐난다. 해가 진 이후에는 더욱 진면목이 드러난다. 서핑숍마다 다양한 문화활동과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댄스음악을 틀어 놓으며 클럽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 있고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매일 저녁 공연하는 곳, 클래식 음악에 직접 우려낸 커피를 제공하는 곳 등 다양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저녁에 휴식을 취하면 된다.

3년 전부터 서핑을 즐기고 있는 대학생 김지민 씨(23)는 방학 때면 친구들과 함께 양양을 찾는다. 다양한 서핑 문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낮엔 서핑하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숍을 골라 즐긴다. 다음 날은 또 다른 데서 놀면 매일 밤을 다채롭게 보낼 수 있다. 한번 온 친구들은 다음에 다시 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서핑의 자유로운 문화도 여성들을 유혹한다. 김수영 씨는 “서핑은 서프보드만 있으면 즐길 수 있다. 별다르게 꾸미지 않아도 된다. 타고 싶을 때 타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해변에 누워 있거나 책을 보거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서핑만큼 일탈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스포츠는 없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박보현 씨가 은행원이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서핑을 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예쁜 가방을 가지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서핑을 접한 뒤 삶의 기준이 바뀌었어요. 서핑은 인생과 비슷해요. 파도를 기다리다 보면 인생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겨요. 이제 어떤 인생의 파도가 오더라도 이겨낼 자신이 생겼어요.”

강원 양양 죽도해변은 여성 서퍼들의 천국이다. 16일에도 50여 명의 서퍼가 파도를 타고 있었는데 여성 서퍼가 절반 이상이었다. 남성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여성 서퍼도 많다. 양양=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강원 양양 죽도해변은 여성 서퍼들의 천국이다. 16일에도 50여 명의 서퍼가 파도를 타고 있었는데 여성 서퍼가 절반 이상이었다. 남성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여성 서퍼도 많다. 양양=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나도 서핑 배워볼까 ▼

광안리-중문-죽도 등에 강습소… 초보자는 스펀지보드가 안전


서핑은 어렵다? 절대 아니다.

운동신경이 없고 체력이 약해도 서핑을 즐기는 데 문제없다. 하루 정도 배우면 서핑을 하기 위한 기초적인 동작을 익힐 수 있다. 강원 양양의 ‘타일러서프숍’의 김종후 사장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 쉽게 배운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서핑 강습과 장비 대여가 가능한 서핑숍이 전국 해수욕장에 분포돼 있다. 부산은 해운대 송정 광안리 다대포, 제주도는 중문 사계 이호 등이다. 양양에는 기사문, 죽도가 대표적이다. 가까운 지역의 서핑숍 또는 서핑학교를 찾아 강습을 받으면 된다. 단순히 서핑을 느끼고 싶다면 단체 강습이, 서핑을 체계적으로 배워 지속적으로 할 생각이라면 개인 강습이 좋다. 양양 지역을 기준으로 2시간 일대일 강습에 15만 원 정도가 든다. 2명 이상이 배우면 가격은 더 내려간다. 처음부터 서프보드를 구입할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 파도와 친해지고 보드 컨트롤이 가능해질 때까지는 초보자에게 안전한 소프트톱(스펀지보드)을 빌려 타면 된다. 대여 비용은 하루 3만5000원이면 충분하다.

서핑은 여름 스포츠로 알려졌지만 사계절 내내 할 수 있다. 더운 7, 8월에는 수영복을 입고 타고 그 외의 계절에는 웨트슈트가 필요하다. 웨트슈트는 빌릴 수도 있지만 서프보드와 달리 구입하는 게 좋다. 가격은 재질과 두께에 따라 2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다양하다.

서핑에 특별한 규칙은 없지만 지켜야 할 에티켓은 있다. 파도의 가장 높은 부분에 위치한 서퍼에게 파도에 대한 우선권이 있다. 한 파도에 한 명의 서퍼가 타는 게 일반적이다. 파도를 끊고 중간에 끼어드는 행위는 금기사항이다. 파도를 향해 손을 저어 나아가는 패들링을 할 때도 파도가 부서지는 곳에서 가능한 한 멀리 돌아서 나가야 한다. 파도를 타고 오는 서퍼와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감당하기 힘든 파도를 피하려고 보드를 던져버리는 행동도 안 된다. 서퍼의 손을 떠난 보드는 언제든 다른 사람과 충돌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서핑 기본 용어 ::

○ 스탠스(Stance)


서프보드에 올라섰을 때 기본자세로 왼발을 앞에 놓고 타는 경우 레귤러(Regular), 오른발을 앞에 놓고 타는 경우 구피(Goofy)라고 한다.

○ 리시(Leash)

보드가 몸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도록 서퍼와 보드를 연결하는 끈.

○ 라인업(
Lineup)

파도가 1차적으로 부서지는 위치로 서퍼들이 모여서 파도를 기다리는 곳.

○ 립(Lip)

파도가 깨지기 시작하는 꼭짓점 부근.

○ 와이프아웃(Wipe-out)

서퍼가 파도를 잡으려 할 때 파도에 말리는 현상으로 국내에서는 일명 ‘세탁기’라 부른다.

○ 패들링(Paddling)

보드에 엎드려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양팔을 이용해 물을 젓는 행동.

○ 테이크 오프(Take off)


패들링으로 파도를 잡은 후 보드 위에 일어나는 동작.

○ 클로즈 아웃(Close out)

파도가 가로로 깨지지 않고, 한 번에 무너져 버리는 모양.

○ 배럴(Barrel)

튜브 같은 모양의 파도 속을 뚫고 지나가는 기술.

양양=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서핑#양양#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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