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사람]최병오 패션그룹 형지 회장

  • Array
  • 입력 2013년 6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페인트가게 외삼촌에게 배운 사업의 기술… 그것은 ‘진심’

그는 자신의 장점으로 ‘진정성’과 ‘친화력’을 꼽는다. 10대 시절 그를 기업가의 길로 이끈 외삼촌에게서 배운 것이다. 5월 2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패션그룹 형지 본사에서 만난 최병오 회장이 기업가로서 인생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그는 자신의 장점으로 ‘진정성’과 ‘친화력’을 꼽는다. 10대 시절 그를 기업가의 길로 이끈 외삼촌에게서 배운 것이다. 5월 2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패션그룹 형지 본사에서 만난 최병오 회장이 기업가로서 인생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병오야, 네가 일을 좀 도와줘야겠다.”

몸이 아픈 외삼촌의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신부전증이라고 했다. 외삼촌은 자동차정비공장이나 대형 조선소를 상대로 페인트 도매업을 했다. 수많은 고객에다 물건까지 관리해야 하는 사업을 아픈 몸으로 꾸려나가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린 조카에게까지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몸이 나아질 때까지 일을 도와달라는 외삼촌의 부탁. 고교 2학년생 최병오(60·현 패션그룹 형지 회장)는 고민에 빠졌다. 공부도 아직 덜 끝났다. 게다가 학교를 마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자고 친구와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픈 외삼촌을 외면할 순 없었다. 외삼촌을 돕는 건 4년 전 간암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모를 일이지만 어머니를 통해 품삯으로 쌀 한 가마니값 정도는 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겨우 몇 달인데….’

최병오는 그날로 부산 중구 국제시장의 오성페인트에서 외삼촌을 돕기 시작했다. 최고점과 최저점을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터 같은 사업가 인생 40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땐 외삼촌과의 인연이 자신의 사업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26세 사장님, 쓴맛을 보다

“네? 외삼촌요?”

페인트가게로 갑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몇 달 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다며 병원에 입원할 때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었다. 외삼촌은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최병오가 일을 돕기 시작한 지 여섯 달쯤 지났을 때였다.

외삼촌의 빈자리는 컸다. 그동안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외숙모를 도왔지만 큰 가게를 문제없이 운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외숙모와 이모는 페인트가게를 정리하기로 했다. 외삼촌 없이 많은 거래처를 상대하기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어디서 튀어나온 도전정신이었을까. 최병오가 대뜸 가게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가족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등학생이 사장님이 되겠다고 나서다니…. 남들에게는 만용이었지만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친절하기로 유명했던 외삼촌이 만들어 놓은 거래처가 그것이었다. 사람 관리만 잘해도 운영에 차질은 없을 터였다. 그는 이모에게 돈을 조금 빌려 가게를 인수했다. 가게 크기는 이전보다 작아졌지만 19세 사장님의 꿈은 몇 배는 커져 있었다.

7년이 지났다. 몇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용케 몇 년을 끌고 왔다. 그런데 왠지 이번 위기에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뭔가가 그의 가슴에서 불쑥 올라왔다. ‘어차피 이판사판 아닌가.’ 최병오는 아예 페인트 제조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의 생각에 수성페인트 공장이란 것은 참 간단해 보였다. 각종 재료를 사다가 잘 섞어주면 그만이었다. 거기에 당시 부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방수페인트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낸 터였다. 독일에서 수입한 유명한 방수액과 카제인, 접착제 등을 잘 섞으면 됐다. 페인트 위로 떨어진 물방물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걸 보며 그는 속으로 ‘대박’을 외쳤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아니, 아예 시작도 못해봤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철공소와 기계제작소 비용에, 공장 계약금과 중도금까지…. 장사로 잔뼈가 굵었다고 자신했었지만 26세 청년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방수페인트의 실용신안 등록을 위해 만난 심사관들의 질문에는 제대로 답도 하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방수페인트도, 외삼촌의 가게도. 외삼촌의 부재는 그렇게 컸다.

“아버지나 외삼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어느 정도 연륜을 쌓고 사업을 벌여야지’라든가 ‘네 나이엔 그렇게 크고 어려운 사업은 무리’라고 말해줄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성장통

1980년, 페인트 사업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 스물일곱 최병오는 종로3가의 한 전자오락실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우뚝 섰다. 커다란 세숫대야에 동전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주인이 세숫대야를 비우면, 한 시간도 채 안돼 손님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동전들이 다시 대야를 가득 채웠다.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전자오락실의 ‘명성’은 결코 허튼 것이 아니었다. 무허가업체라 바지사장과 실제 주인이 5 대 5로 돈을 나눠 가져도 이익이 남는다고 했다.

얼른 돈을 벌고 싶었다. 페인트가게 때문에 진 빚도 청산해야 했다. 부산의 아는 사람을 통해 전자오락기계를 거저 구하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업소 허가였다. 서울에서는 1973년부터 전자오락실 신규 허가를 전혀 내주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무허가업소만은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서울 대신 인천 북구(지금의 인천 부평구)에서 ‘유기장’을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인천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담당 공무원은 “허가를 내줄 수 없다”며 매번 고개를 내저었다.

“형님, 형님.”

최병오는 공무원의 팔을 붙들었다. 상대방의 지위에 관계없이 진심을 담아 ‘형님’ ‘아버님’으로 높여 부르는 것은 외삼촌의 습관이기도 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전 정말이지 무허가업소는 하고 싶지가 않소. 요건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면 꼭 만족시켜서 돌아오겠습니다.” 반복되는 부탁에 공무원의 딱딱했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무사히 허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

오락실은 큰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그렇게 다섯 달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머리가 번뜩였다. 허가는 받기 어렵고, 오락실을 하려는 사람은 많으니 이곳을 팔아넘기면 다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는 1만8000원을 주고 신문에 ‘인천 부평 오락실, 허가 유(有)’라는 짤막한 매매 광고를 실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바로 그 이튿날, 최병오는 점포 인수를 원하는 사람들이 걸어온 50통이 넘는 전화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1000만 원을 투자했던 오락실은 8000만 원에 팔렸다.

그는 이제 잘되지 않거나 성장 가능성이 없는 사업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초보 사업가가 아니었다. 공무원의 마음을 돌린 것도, 순간적인 판단으로 오락실을 재기의 발판으로 마련한 것도 모두 외삼촌의 페인트 가게에서 얻은 경험 덕이었다. 그런데 오락실을 처분해 빚을 갚고 나니 번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원점이었다.

마음씨 좋은 빵집 아저씨

“최 서방, 구반포에 전화 한번 해볼래?”

1981년 어느 날, 동서가 최병오를 대뜸 불렀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직후였다. 의아했다. 그가 오락실을 처분하고 난 후 딱히 하는 일이 없을 때도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던 동서였다.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라는 느낌은 들었다. 병원에서 한참 장인어른을 간병할 때 동서가 지나가는 말로 “최 서방은 경험이 있으니 장사를 하면 잘하겠다”고 말한 것이 문득 떠올랐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동서는 새로 인수한 구반포의 제과점 ‘백자당’을 운영해달라고 부탁했다. 서울 광진구 중곡동 동서의 집에서 처가 사람들과 상견례를 하던 자리에서 바로 장인어른의 안색을 살펴 병원에 모셔갔고, 몇 달을 병원에서 간병을 하며 지내는 모습을 좋게 보고 마음을 연 것이었다.

최병오는 제과점의 ‘제’ 자도 모르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속에서 뭔가 올라왔다. 피할 수 없는 도전정신…. 기꺼이 하겠노라고 답했다.

당시 구반포는 1970년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뒤 인구가 부쩍 늘고 부잣집도 많은 ‘핫 플레이스’였다. ‘백자당’은 천호동 사당동에서 오는 버스의 종점 바로 앞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퇴근하거나 하교하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빵이나 과자를 사들고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근처에는 유명한 빵집이 모조리 모여 있어 경쟁이 치열했다.

최병오의 머리가 또 번뜩였다. 일부러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간대를 골라 ‘센베이(전병)’를 구웠다. 냄새는 온 거리를 가득 채웠다. 여름에는 팥빙수를 팔았다. 1년 반 만에 동서 김 씨가 제과점을 인수할 때 썼던 대금 7000만 원을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었다.

당시 최병오는 근처 세화여고 학생들에게 빙수에 들어가는 팥을 한 숟갈씩 더 퍼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로 통했다. 제과점을 처분한 뒤에도 동네 사람들은 “빵 열 개 사면 하나 더 얹어주던 젊은 총각 어디갔냐”고 말하곤 했다. 친절과 서비스 정신이라는 외삼촌의 사업 수완은 이미 그에게로 모두 옮아온 상태였다.

동대문의 신화가 되다

제과점을 그만두고 시작한 의류사업. 그는 동대문에서도 잘나가는 사장님이 됐다. 상가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권리금만 2억 원이 넘는 좋은 위치로 점포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또 4년이 지났다. 이제는 동대문 상인들 중에서 당좌거래를 하는 몇 안 되는 업체 중 하나가 됐다. 통장에는 1억 원이 넘는 현금이 쌓였다.

물론 처음부터 잘 풀린 건 아니었다. 그가 처음 입점했던 동대문 종합시장의 3.3m²(1평) 크기 가게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새로 지은 상가에 있었다. 상가에는 이런 일을 처음 하거나 영세한 점포가 대부분이었다. 손님들은 상가를 쑥 훑어보고는 동대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매출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상가에 앉아서 손님이 찾아오기만 기다려서는 금세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그는 바지를 어깨에 들쳐 메고 주요 시장을 발로 뛰었다. 매장은 부인에게 맡겼다. 서울 천호의류공판장, 반포, 명동의류상가부터 시작해 부산의 부산진시장, 국제시장 의류 점포를 일일이 돌며 바지를 팔았다. 직접 만든 물건이라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다. 가게 주인들에게 우선 제품 가격의 반값만 치르고, 나중에 장사가 잘되면 나머지 비용을 달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가게 주인들은 서른 살 청년의 당돌함에 곧잘 물건을 들여놓곤 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그는 원단 사업도 함께 했다. 당시 동대문에서 원단과 제품 제조를 함께 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업을 함께 하면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품 원가를 3분의 2 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 전화기 두 대를 설치했다. 하나는 바지 제조업체인 ‘크라운 바지’의 대표전화, 하나는 원단 제조업체 ‘진선미 양행’ 전화였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그러나 큰 성공이 오히려 화근이었을까. 아는 사람들에게 어음을 빌려주기 시작하면서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어음 관리에 집착하기 시작하자 사업은 뒷전이 됐다. 어음을 막기 위해 3일 전부터 돈을 준비하거나 어음을 빌려준 사람에게 미리 전화를 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바지의 품질은 예전 같지 않았다. 재고가 쌓여만 갔다.

1993년 11월 23일, 최병오는 한 은행의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오후 3, 4시면 들어왔던 자금이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오후 5시 반, 은행 업무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종 부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절망감에 눈물이 흘렀다.

멍하니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집착하던 것이 모두 사라지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다시 동대문 남평화시장의 쪽방으로 들어갔다. 패션그룹 형지의 전신인 형지물산을 만든 것도 그때의 일이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동대문의 신화’가 됐다. 패션그룹 형지의 지난해 매출은 약 7800억 원이다.

장미꽃 건네는 회장님

최병오는 지금도 항상 진정성과 친화력을 강조한다. 부산 오성페인트 시절 외삼촌에게서 배운 ‘장사의 기술’ 그대로다. 그는 “형지의 대표 브랜드 ‘크로커다일 레이디’를 처음 국내로 들여올 때 싱가포르 크로커다일 본사의 다토 탄 회장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진정성과 친화력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제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주변에서 좋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최근 3년 동안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느라 힘들었을 때는 대리점 사장과 회사 직원들에게서 에너지를 받았죠. 평소 이해관계보다는 진정성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들을 대한 게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60대에 들어선 그는 올해를 ‘인생 3막’ ‘사업의 성숙기’라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오랜 경험을 꽃피울 시기라는 것이다. 그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하던 습관도 고쳐보기로 했다. 제때 쉬어야 일도 더 잘된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비가 내렸던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패션그룹 형지 본사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직전 대뜸 기자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비 오는 날에는 빨간 장미를’이라는 말이 생각나 본사 직원들에게 빨간 장미를 한 송이씩 건넨 뒤 남은 마지막 한 송이라고 했다. 이순(耳順)이 된 최병오의 꿈은 사업도 잘하고, 사회공헌도 잘하는 멋진 회장님이 되는 것이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형지#최병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