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Exploration]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 산마을 사람들은 따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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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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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 설산… 꽃산… 그리고 길 위의 친절

3개의 산봉우리가 수증기를 뿜어내듯, 새하얀 구름이 산 정상을 에워쌌다. 거대한 바위가 군락을 이룬 이탈리아 돌로미테 산군의 트레치메디라바레도는 암벽 등반가들의 로망이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야생화들과 돌로 만들어놓은 뜻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동알프스=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3개의 산봉우리가 수증기를 뿜어내듯, 새하얀 구름이 산 정상을 에워쌌다. 거대한 바위가 군락을 이룬 이탈리아 돌로미테 산군의 트레치메디라바레도는 암벽 등반가들의 로망이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야생화들과 돌로 만들어놓은 뜻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동알프스=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앞에 가시는 할머니에게 전해줘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백발의 유럽인 할머니가 건네준 사탕 하나를 손에 쥐고 뛰었다. 하얀 포장지에 고스란히 밴 따뜻한 온기가 뜀박질을 재촉했다. 분홍색 모자를 곱게 눌러쓴 김세숙 씨(75·여)를 쫓아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아이고, 고맙기도 해라. 내 기침 소리를 들었나봐.”

24일 오전 이탈리아 동북부 돌로미테의 ‘트레치메디라바레도’. 두 여성이 공유하는 것이라고는 온몸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뿐이겠지만, 푸른 눈동자에 흐르던 온정은 잠시 스쳐 지나는 동양의 이방인에게까지 가 닿았다.

전쟁터였던 암벽 등반의 요람

회색과 황토색이 뒤섞인, 나란히 선 3개의 거대한 바위산(트레치메는 이탈리아말로 세 봉우리라는 뜻)을 오른쪽에 두고 다시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바닥의 돌멩이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냇물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투명한 물이 돌들과 부딪혀 내는 시원한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중간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밟고 시내를 건넜다. 샛노란 트롤블루메(trollblume·금매화)가 하얀 돌멩이들 옆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옆의 보라색 엔치안(enzian·용담)도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산에 다닌 지 40여 년이라는 길잡이 토니 무츨레흐너 씨(60)가 가르쳐 준 꽃들이었다. 이탈리아인이 가르쳐준 독일어 꽃 이름을 작게 되뇌어 본다. 트레치메디라바레도가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 중 하나라는 말이 실감난다. 트레치메디라바레도보다 독일어 지명인 ‘드라이 치넨(Drei Zinnen·세 개의 흉벽)’이 더 친숙했던 이유도.

실제로 바위산은 1919년까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가르는 국경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이탈리아로 귀속됐다. 전쟁 당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이 바위산 부근이었다. 저 멀리 암벽에 뚫려 있는 동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이 참호로 이용했던 것들이다. 전날 스쳐지나갔던, 바위산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이탈리아 남티롤 주 브루니코 마을의 숲속 묘지가 떠올랐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바위산이 있는 알프스 돌로미테 산맥에서 전사한 군인 1000여 명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곳.

“저기 두 명이 암벽등반을 하고 있네요.”

무츨레흐너 씨가 바위산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자 개미만 한 점처럼 바위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높이 2973m의 치마 오베스트(서쪽 봉우리)였다. 불과 30분 전에 “아직 바위가 차가워서 암벽 등반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했던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가운데 봉우리인 치마 그란데(거대한 봉우리)가 제일 높은데, 높이가 2999m예요. 서쪽 것이 치마 오베스트, 제일 작은 봉우리가 치마 피콜라(작은 봉우리)로 2857m죠. 황토색 부분은 오버행(수직 이상의 경사를 지닌 곳)이라서 올라가기가 더 어려워요.”

때마침 암벽등반 장비를 한가득 등에 짊어진 청년 하나가 걸어 내려왔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요세미티국립공원과 함께 전 세계 암벽 등반가의 요람이라 불리는 곳. 바위산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바위산을 가운데 두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산은 그렇게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게 먼저 “헬로”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흘째 계속된 산행으로 제법 익숙해진 인사. 그가 미소를 지으며 “헬로”라고 받아줬다.

낯선 이의 친절

산행의 시작은 21일 독일 퓌센의 테겔베르크 산이었다. 미국 디즈니랜드 ‘백조의 성’의 모델로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다리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댔다. 그 다리를 지나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산에 올랐다.

동네 뒷산에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운동화에 산행용 스틱 2자루만 달랑 들고 산을 오르는 노부부, 주황색 긴팔 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고 물이 든 유리병 하나만 왼손에 든 채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는 청년. 그리고 “겨우 네 살, 일곱 살 된 아이들에게는 좀 힘들 것 같아서 집에 남겨두고 혼자 왔다”는 40대 주부까지. 등산화에 등산배낭, 등산점퍼에 스틱까지 완전무장한 채 산을 오르는 한국인들에게 이들은 “헬로”라며 인사를 먼저 건넸다. 쭈뼛대며 들릴 듯 말 듯 받아주던 인사는 약 1800m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스스로를 ‘우드맨(산지기)’이라고 소개하는 벤저민 씨(32)와 하인리히 씨(43)도 그 길에서 만났다. 등에 기름통을 맨 벤저민 씨는 두 손에 전기톱을 들었고, 하인리히 씨는 양손에 자루가 긴 도끼 두 자루와 끌을 들었다. 그들은 “올라갈수록 ‘백조의 성’의 또 다른 모습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과 헤어진 지 5분이 지나지 않아 요란한 전기톱 소리가 숲속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오솔길 위에 쓰러져 있던 나무를 잘라내는 소리리라. 그 나무 때문에 함께 길을 걷던 일행들은 땅바닥을 기어야 했다. 전기톱 소리는 산 능선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기에도 머루가 있네.”

바로 앞서 가던 김재경 씨(53·여)가 스틱으로 길가에 난 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산이 좋아 적금을 꼬박 1년 반 동안 부어 이번에 왔다는 그의 배낭은 초콜릿과 사탕으로 가득했다. ‘유럽 3개국 동알프스 트레킹’에 함께 온 일행 16명 중 한 명이 발에 쥐가 나자 응급처치의 일환으로 엄지발가락을 찔렀던 수지침도 그의 배낭 속 손가방에서 나왔다. 약 9년 전부터 산에 다녔다는 그는 늘 일행의 맨 뒤에 섰다. 그리고 그 뒤에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는 기자가 있었다. 일정표에 적힌 ‘산행난이도: 쉬움-중간’이 무색했다.

“평소에 산에 안 오르면 아무리 쉬운 산이라도 쉽지 않아.” 그녀가 웃으며 사탕 한 움큼을 손에 쥐여줬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셰의 대사가 떠올랐다. “낯선 이의 친절로 살아간다.” 낯선 이의 친절은 피부색을 가리지 않는다.

산행은 만년설이 뒤덮인 오스트리아의 피츠탈로 이어졌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위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그저 조금만 높이 뛰어오르면 손에 닿을 것만 같은 구름과 나뿐이었다.

24일 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동알프스 트레킹 코스를 둘러보는 일정이 끝났다. “몸을 만들어서 왔다”는 일행 중 누군가의 말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쉽지 않은 코스였다. 그래도 나와 낯선 이들의 친절로 가득 채워진 길이었다.

지난 나흘 동안 늘 산행의 선두에 섰던 혜초트레킹 김진홍 과장(39)이 어디선가 봤다며 모차르트가 썼다는 편지의 한 구절을 들려줬다.

“만일 대주교가 저에게 2년마다 여행을 허락하지 않으면 저는 어떤 자리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여행을 하든, 하지 않든 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도 신성 모독은 아니라고 봅니다―은 늘 같은 곳에만 머물면 나빠집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공기가 그의 말과 함께 폐 속 깊숙이 들어와 박혔다. 모차르트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늘 같은 곳에만 머물면 나빠지지 않을까.

[1]오스트리아 피츠탈의 슈투바이어 글래처. [2]독일 퓌센의 테겔베르크 산 하산길에서 만난 야생화들. [3]테겔베르크 산 중턱에서 바라본 노이슈반슈타인 성. [4]이탈리아 남부 티롤의 전통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 [5]이탈리아 남티롤 주 브루니코 마을에 있는 메스너 산악 박물관. 동알프스=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1]오스트리아 피츠탈의 슈투바이어 글래처. [2]독일 퓌센의 테겔베르크 산 하산길에서 만난 야생화들. [3]테겔베르크 산 중턱에서 바라본 노이슈반슈타인 성. [4]이탈리아 남부 티롤의 전통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 [5]이탈리아 남티롤 주 브루니코 마을에 있는 메스너 산악 박물관. 동알프스=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동알프스=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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