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민화의 세계]제왕-부귀 상징 모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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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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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화엔 없는 나비 훨훨, 소박하고 정이 듬뿍

‘모란도’(19세기 후반),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종이에 채색, 37.5×76.0cm. 민화 모란도에서는 직선으로 단순화한 수석을 중심으로, 활짝 핀 붉은 모란꽃 세 송이와 두 마리의 흰 나비가 간결하면서도 활력 넘치게 표현됐다.
‘모란도’(19세기 후반),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종이에 채색, 37.5×76.0cm. 민화 모란도에서는 직선으로 단순화한 수석을 중심으로, 활짝 핀 붉은 모란꽃 세 송이와 두 마리의 흰 나비가 간결하면서도 활력 넘치게 표현됐다.
우리나라의 전통 꽃그림은 단순히 꽃의 아름다움만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예쁜 꽃만 그리는 것은 본질의 표현 없이 변죽만 울리는 것으로 치부될 정도다. 우리의 꽃그림 속에는 문학과 역사, 사상이 깔려 있다. 민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적인 따뜻함까지 곁들인다. 다른 그림에 비해 민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 화려함으로 장식된 궁중의 모란병풍


‘꽃 중의 왕’인 모란은 임금을 상징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당나라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도 석 점과 모란 씨 석 되를 선물했다. 지혜로운 여왕은 그 선물들이 배필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희롱하는 것이란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그림의 내용이 향기 없는 모란(여왕)엔 벌과 나비(남자)가 찾아들지 않는다는 걸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자신이 ‘향기 없는 왕’이 아니라 ‘향기 나는 왕’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보란 듯이 경주에 분황사(芬皇寺)를 세웠다. 분황사란 ‘향기 나는 왕의 절’이란 뜻이다.

모란의 또 다른 상징은 부귀(富貴)다.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周敦이·1017∼1073)는 화려한 모란을 부귀한 꽃이라 했다. 부귀하다는 것은 재산이 많고 출세한다는 뜻이니, 현실적으로 이보다 더 좋은 복락이 어디 있겠는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은 궁중 그림이나 문양의 소재로 제격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모란병풍이 일월오봉도나 십장생도 병풍만큼 많이 만들어졌다. 모란병풍은 주로 왕이 거처하는 어전이나 침전에 설치됐다. 왕실의 혼례인 가례(嘉禮)나 왕세자를 책봉하는 예식인 책례(冊禮)와 같은 즐거운 잔치뿐만 아니라 제례나 상례와 같은 슬픈 의례 때도 널리 사용됐다. 모란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최근 운현궁에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진 ‘괴석모란도병’은 장식성이 돋보이는 궁중장식화 병풍이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집으로, 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이다. 이 병풍엔 김홍남 이화여대 교수의 표현처럼 오색 모란의 ‘꽃 기둥’이 화면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이다. 모란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까닭은 꽃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더군다나 수석(壽石)은 장수를 의미하니 행복을 축원하는 의미가 배가된다. 이 모란병풍은 화려하긴 하지만, 민화와 달리 벌과 나비가 보이지 않는다.

○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민화 모란도

‘괴석모란도병풍’(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비단에 채색, 각 폭 54.5×231.0cm. 궁중에서 그려진 대표적인 모란도로 사진은 8폭 중 4폭만 찍은 것이다. 모란꽃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배치돼 상징성이 강하고, 화려함과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괴석모란도병풍’(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비단에 채색, 각 폭 54.5×231.0cm. 궁중에서 그려진 대표적인 모란도로 사진은 8폭 중 4폭만 찍은 것이다. 모란꽃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배치돼 상징성이 강하고, 화려함과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모란병풍은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사랑을 듬뿍 받았다. 경기도 성주굿(집안의 길흉화복을 관할하는 성주신에게 재앙을 물리치고 행운이 있게 해달라고 비는 굿)의 사설은 “모란평풍에 인물평풍 화초평풍을 얼기설기 쌍으로 쳐놓고”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모란병풍을 첫머리에 내세운 것은 그만큼 사용 빈도가 높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간의 혼례 때도 궁중에서처럼 마당에 모란대병을 설치했다. 평소에는 꿈도 못 꿀 일이겠지만, 서민들도 혼인하는 날만큼은 모란병풍을 두르고 왕처럼 대접을 받았다. 문제는 모란대병의 값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모란대병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든다. 이 때문에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관청인 제용감(濟用監)에서 가난한 선비들을 위해 혼례 때 모란대병을 빌려주는 대민 서비스를 제공했다.

민간에서는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할 때도 모란의 이미지를 빈번하게 썼다. 상여 곳곳을 모란으로 장식했고 제사 때 모란병풍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찰에서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명부전에 모란병풍을 설치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모란꽃으로 된 지화(紙花·종이꽃)를 들고 여러 신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에 있는 민화 모란도(모란병풍 중 두 폭)는 서민의 정서가 궁중과 어떻게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빽빽이 들어앉았던 모란꽃들이 소담스럽게 핀 몇 송이로 정리되자 화면에는 넉넉한 여백이 생겼다. 이런 여유로움 덕분에 나비(한 폭에는 흰 나비, 다른 한 폭에는 검은 나비)도 그림에 등장할 수 있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는 이 모란도와 같은 병풍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폭의 그림이 소장돼 있다. 이 그림들에서는 새까지 모란에 날아든다.

궁중에서 제작된 모란도병풍은 화려함과 장식성에 치중했다. 그러다 보니 당태종이 보낸 모란도처럼 벌과 나비까지 아우르지는 못했다. 반면 자유로운 민화에서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넘친다. 설사 그림 속에 모란꽃이 적어 부귀에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서적으론 더 풍요롭다. 민화작가의 소박하고 인간적인 바람이 이 작품에 훈훈한 향기로 피어난 것이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amkakhwa@naver.com
#모란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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