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12]단편소설 ‘치킨 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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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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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동그란 눈 앞 두개, 처음 목격한 건 캄캄한 공중에 떠 있는 두 눈이었다. 뽀얀 수정체를 배경으로 새까만 동공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두 다리가 보였고 치켜든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사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끈을 붙잡고 두 발로 허공을 차대는 사내의 몸짓은 분명 구해달라는 신호였다. 그러니까 채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나는 다시 사내의 발밑으로 뛰어들었다.” 》

마지막 배달이었다. 아니, 마지막 배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굼뜨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고, 차들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골목 입구를 지켰다. 시곗바늘은 새벽 한 시와 두 시 사이에 가까스로 멈춰 있었다. 그러니까 어중간한 시간이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서둘러 배달을 마치고 돌아가면 쫀쫀한 사장은 분명 피자 상자나 포장된 치킨 봉지를 하나 더 내밀 게 뻔했다. 주문이 없으면 빗자루나 대걸레를 내밀겠지. 되도록 이번 배달을 두 시에 가깝게 마치고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보름간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익힌 나름의 노하우였다. 시간만 잘 맞춘다면 정시에 퇴근하거나 일이 분 더 일찍 퇴근할 수 있을 터였다.

드문드문 켜진 창들을 달고, 건물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색이 모두 사라진 밤에는 동네의 풍경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원룸과 다세대 가옥은 오르막을 따라 위태롭게 늘어서 있었는데,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올라가다보면 동네가 무한히 계속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밤에는 더 자주, 이사 가는 상상을 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그리고 그런 희망사항을 가지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양선미.

양선미,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원룸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거나, 어차피 산 밑까지 달려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양선미는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고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양선미가 아니지만 양선미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이 동네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아니, 동네 자체가 양선미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제 정확히 한 달 하고 구 일째.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예의나 상식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선미는

―우리 그만 만나.

했다. 시원하게 뻗은 팔차선 도로를 내달리며 나는 응? 하고 되물었다. 오토바이가 밤공기를 뚫었고 선미의 말이 순식간에 후방으로 밀려났다. 재차 되묻다가 나는 세 번째에 그냥 응, 하고 말았다.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일 말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선미가 수시로 하는 말. 좋아? 더 빨리, 사랑해 정도의 사소하고 흔한 대사라 짐작했다. 그리고 선미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힘껏 꼬집었다. 비명과 함께 오토바이가 멈춰선 건 그 다음이었다. 내가

―미쳤냐? 이 기집애가…….

하고 타박을 쏟아놓기 전에 선미는

―딴소리하기 없어. 이 시간 이후로 우린 남남이야.

했다. 그러곤 또박또박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멀어졌다. 험한 말로 대거리 한 번 못한 채, 차인 셈이었다. 차들이 요란한 굉음을 만드는 대도로, 한가운데서. 무방비로. 그것도 단 한 번 만에.

원룸 건물에 들어서기 전, 나는 시각을 확인했다. 한 시 사십삼 분. 치킨 냄새로 부푼 봉지를 건네고 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는 시간은 대략 일 분이면 족했다. 그러니까 나머지 시간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꾸물거리며 메워볼 요량이었다. 나는 봉지에 적힌 101호라는 쪽지를 확인한 뒤, 서너 개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건물주들의 잔꾀 탓으로 요즘은 제대로 된 일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애매한 반지하방이 생겨나면서 일층은 지하와 이층 사이에 교묘하게 끼어버렸고, 이층과 삼층도 어그러지긴 매한가지였으니까. 계단에 다 내려서기도 전에 센서등이 켜졌다. 서둘러 101호의 벨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잠깐 쉰 뒤 세 번.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건, 벨을 네 번째 눌렀을 때였다. 현관문 너머에선 아무 기척이 없었고, 전화는 수신음만 갈 뿐 받는 이가 없었다. 한 달에 몇 번꼴로 있는, 대략 난감한 순간이었다. 처음엔 허둥지둥하다가 문득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화가 치밀기까지는 대략 오 분 정도가 걸린다고, 사장이 말한 적이 있었다. 서둘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착 가라앉은 사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 주변에 수소문해봐. 혹시 잘못 적었을지도 모르니까.

오 분은커녕 일 분도 못 넘기고 화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101호와 열 뼘쯤 떨어진 102호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다음엔 좀 더 세게, 마지막엔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어쨌거나 두 시라고 못 박아둔 퇴근 시각이 늦어지는 일은 원치 않았으므로. 102호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재수가 좋으면 사장이 치킨 봉지와 함께 퇴근을 허락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주인 없는 치킨이고 버리는 것보다야 알바생에게 줘버리는 것이 두고두고 생색을 내기에도 용이했으니까.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려던 참이었다. 가늘고 희미했지만, 분명 인기척이 맞았다.

102호였다. 두꺼운 철문을 힘겹게 빠져나온 소리는 중얼거리는 말소리 같기도, 앓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느 쪽도 분명하진 않았다. 소리들은 철문을 빠져나오자마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처 내 귓가에 닿기도 전에. 나는 두꺼운 철문 위에 한 쪽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저기요.

하면 목소리가 텅 빈 복도를 때리고 되돌아왔다. 다급해질수록 돌아오는 목소리는 커다란 진폭으로 건물 전체를 떵떵 때렸다. 서너 번 더 불렀다간 위층에서 누군가 달려 내려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왼쪽 손목에 치킨 봉지를 걸고,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비틀었다. 문은 쉽사리 당겨졌고, 허약한 소음들이 또렷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격렬한 숨소리와 뒤섞인 신음이었다.

―저, 저기요? 계, 계세요?

센서등 불빛이 방 안으로 돌진하면서 내부의 풍경이 드러났다. 나는 보폭을 좁혀 현관 앞까지 다가갔고, 마침내 신음의 정체가 밝혀졌다.

동그란 눈 알 두 개. 처음 목격한 건 캄캄한 공중에 떠 있는 두 눈이었다. 뽀얀 수정체를 배경으로 새까만 동공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두 다리가 보였고 치켜든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필사적으로 뭔가를 붙잡는 두 팔이 선명해진 다음, 마지막으로 천장과 목을 연결한 단단한 끈이 나타났다. 가는 줄에 의지해 공중에 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육중한 사내였다. 사내는 으, 으으으, 으으으으, 하다가

―도, 도와, 도와줘요.

하고 간신히 내뱉었다. 나는 왼쪽 손목에 걸린 치킨 봉지를 단단히 부여잡은 채, 입을 벌렸다. 정확히 말하면 입이 벌어졌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꼴깍 침을 삼켰는데, 사내의 발버둥이 한층 더 격렬해지고 있던 차였다. 사내는 아까보다 더 간신히

―도, 도와, 다, 달라니까.

했다. 그러니까 무엇을, 도와달라는 건지 충분히 헛갈릴 법한 상황이었다. 신중한 판단을 내릴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사실 달릴 수 있을 만큼 방이 넓은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천장엔 손이 닿지 않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의자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채였다. 나는 우왕좌왕하며 발버둥치는 사내 주변을 서너 번 돌다가, 사내의 두 발 아래로 몸을 집어넣었다. 겁에 질린 사내의 발이 내 어깨에 가지런히 착지하기까지, 무수한 발길질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이를 악 물었다. 사내는 내 어깨에 체중을 온전히 실은 다음, 한꺼번에 많은 공기를 들이켰다 뱉어냈다. 그러곤

―카, 칼 있어요?

물었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두 손으로 줄을 비틀어 끊었다. 아니 뜯어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뚝.

줄이 끊어졌고 내가 먼저, 뒤이어 사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치킨 봉지가 내 팔꿈치 아래서 납작하게 우그러졌다. 그리고 사내는 죽을힘을 다해 숨을 쉬었다. 팔 평 남짓한 방의 공기를 죄다 들이마실 것처럼 길고 거친 호흡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조금씩 현관 쪽으로 기어 나왔다. 어깨뼈가 내려앉을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엎어져 있던 사내가 나를 불렀다.

―저, 저기요. 거기 냉장고에 무, 물 좀 줘요.

―물요?

내가 되물었고 사내가

―거기, 냉장고.

한 뒤 숨을 뱉었다. 나는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통과 잔뜩 오그라들어 형체를 알 수 없는 과일, 묶여진 봉지를 제외하면 내부는 텅 빈 거나 다름없었다. 주홍빛 조명 아래, 남아도는 냉기는 처량해 보였다. 사내가

―문 쪽에요.

하며 한 번 더 재촉했고, 나는 물통을 집어 건넸다. 사내는 입을 벌리고 목구멍으로 물을 쏟아 부었다. 사내의 목울대가 급하게 오르내렸다. 그러니까 쉼 없이 물을 삼키는 그 소리 때문에 나는 사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나는 망가진 치킨 봉지를 주워들었다.

―정말 죽을 뻔했어요. 근데, 누구세요?

사내는 물을 마시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천진하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나는 납작해진 치킨 봉지를 공중에 흔들어 보였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두 시 정각에 퇴근하고 두 시 십 분쯤 귀가할 거란 예상은 오늘도 여지없이 빗나간 셈이었다. 사장은 망가진 치킨 봉지를 선심 쓰듯 건넸고, 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 치킨 봉지를 던져 버렸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치킨 상자를 보면 사내가 떠오를 게 뻔했으므로 버리는 편이 나았다. 좁은 골목길, 촘촘히 붙은 창들은 캄캄했고 다시금 이 동네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창 너머의 사연을 엿보게 되는 비극이 또 일어나기 전에, 이사를 가야 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언제. 나는 싸늘하게 식은 철제 계단을 차곡차곡 밟아 올라갔다.

이동네로 옮겨온 것은 이 년 전이었다. 이사 오기 한 달 전, 어울리는 녀석의 소개로 선미를 만났고 선미가 사는 동네가 이곳이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방값이 저렴한 때문이었다. 부동산 여자는 서너 개의 집을 돌고 가장 마지막으로 이 방을 보여주며

―그 가격대에 맞추려면 겨우 이런 집이나 가능해요.

했다. 여름에는 몹시 덥고 겨울에는 얼어 죽을 만큼 춥다는 충고를 선심 쓰듯 알려준 다음이었다. 나는 비좁은 방과 겨우 용변만 볼 수 있는 크기의 화장실을 확인한 다음

―이 방으로 할게요.

했다. 가장 먼저 해가 들고 가장 선명한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내세운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선미가 사는 곳과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우면 선미가 오가기 쉬울 테고, 자연스럽게 선미가 자주 드나들 거라고 믿은 탓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저런 조건을 맞추기엔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계약을 마치고 선미에게 처음 집을 보였을 때, 그녀는

―멋지다. 멋지다. 멋지다.

세 번 말했다. 네 번 만에 내 목에 팔을 두르며 이렇게도 소곤거렸다.

―이런 집을 혼자 구하다니 정말 오빠는 대단한 사람이야.

분명 진심이었을 테지만 겨우 반년을 못 넘기고 선미는 이렇게 말을 바꾸었다. 그만 만나, 하고 팔차선 도로를 가로지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선미는

―우린 그냥 만나서 재밌게 논 거야. 그게 다야. 나도 이제 안정된 사람을 만나야지.

했다. 수백 번 이상 통화 연결음을 견딘 직후였다. 내가

―안정된 사람이라니?

하고 물었고 선미가 한숨을 내쉬듯 속삭였다.

―나 곧 이사가. 이제 공부하고 대학도 갈 거야. 이렇게 사는 거 싫어.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황망하고 어이없는 방식일 거라곤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명백한 이별이었다. 이사를 간다는 예고도, 헤어지자는 선포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 더 ‘이렇게 살기 싫다’는 그녀의 고백에 맥이 빠졌다. 그녀는 늘 내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거라는 안도감 같은 걸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함께 질주하던 그 많은 순간들을, 그녀는 어쩌면 견디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이젠 이곳을 떠나 다른 세계로 또각또각 걸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팔차선 도로를 차분히 건너던 그 밤처럼, 선미는 이제 안전이 보장된 인도 쪽으로 완전히 옮겨가려 하고 있었다.

선미가 떠난 동네를 나는 종일 헤매고 다녔다. 치킨 봉지나 피자 상자를 싣고. 할 수 있는 거라곤 매일 서너 번씩 이사 가는 상상을 하는 것뿐이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정말이지 여기만 아니라면 나도 선미처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굴곡 없는 산책로와 반듯한 도로에 일렬로 늘어선 동네. 그런 동네가 아니라도 기형적인 건물과 위태로운 옥탑방이 늘어선 골목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하자면 떠나기 위해 나는 쉬지 않고 동네를 돌고 또 도는 셈이었다.

그에게서 연락을 받은 건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고 사장은 갓 튀긴 치킨을 봉지에 담았다. 봉지가 따뜻하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치킨 봉지에 붙은 주소를 확인하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그러니까 거기가 거기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눈치챘다 해도 정확히 배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테지만. 102호 원룸 앞에 서고서야, 그곳이 며칠 전 그 원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벨을 누르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 며칠 만에 치킨이 먹고 싶어 주문 전화를 걸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딩동.

벨이 한 번 울리고 두 번 울렸을 때 사내가 문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내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나는 헬멧을 벗지 않은 채 치킨 봉지를 건넸고 그가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헬멧 쓰고 있어도 다 알아요.

손을 뻗어 만 원짜리 두 장을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사내는 컴컴한 캡 속에 가려진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맞죠?

이만 원을 낚아채고 나머지 금액을 거슬러준 다음 뒤돌아서면 그만이었다. 돈을 가져가려는 찰나, 사내가 검지와 엄지 사이에 낀 이만 원을 제 쪽으로 되가져가며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때 당신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죽을 수 있었다고요.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캡을 젖혔다. 결정적으로 그 말이 비위를 상하게 한 탓이었다. 이것 봐요, 내가 당신 목숨을 구했다고요, 하고 소리치는 대신 나는

―네?

하고 작게 되물었다. 사내가 이만 원을 도로 제 주머니에 넣으며 소곤거렸다.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올래요? 잠깐이면 되는데…….

헬멧이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문을 조금 더 젖힌 다음,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 아주 잠깐이면 된다는 생각을 한 내가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전 정말 죽을 수밖에 없어요.

사내는 오래 뜸을 들인 다음 그렇게 말했다. 고소한 치킨 냄새가 서늘한 방 안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내는 상자를 열어 살코기 한 점을 베어 물며 이미 예정된 일이에요, 하고 못을 박았다. 사내의 두꺼운 손이 추리닝 위를 쓱 문지를 때마다 나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이만 원을 떠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만 원을 주면 잽싸게 거스름돈을 지불하고 방을 나올 심산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내의 말을 뚝 잘라 먹을 순 없었는데 순전히 사내가 죽음을 생각할 만큼 나약하고 가여운 사람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사내 스스로 돈을 지불할 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심정으로 버텨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 육천 원입니다.

돈 이야기를 꺼낸 건, 방으로 들어온 지 이십 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내가 두툼한 닭다리를 건네던 참이었고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을 때였다. 나는 전화벨을 강제로 차단한 뒤

―아무래도 배달이 밀려서요.

하고 양해를 구했다. 사내는 들고 있던 닭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니까 우물거리는 발음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기 힘들었다. 내가 네? 하고 되물었고 한꺼번에 고기를 씹어 삼킨 사내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 좀, 도, 와, 달, 라, 고, 요.

그러고는

―도와줄 거죠?

하고 얼굴을 디밀었다. 말하자면 그런 때, 사내는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도와줄 만한 일은 하나도 없을 만큼 지나치게 멀쩡하고 건강해 보였다.

―뭘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사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끈을 붙잡고 두 발로 허공을 차대는 사내의 몸짓은 분명 구해달라는 신호였다. 그러니까 채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나는 다시 사내의 발밑으로 뛰어들었다” 》

내가 물었고 사내가

―왜 지난번에……. 알잖아요.

하고 검지와 엄지를 한 번씩 쪽쪽 빨았다. 아무래도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사내는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닭고기를 씹었다.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웅얼거리면서. 이만 원을 받고 사천 원을 거슬러 줄 때까지 사내는 요지부동이었다. 때문에 나는 헬멧을 쓰고 캡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몰라요. 생각해 볼게요.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황당한 이야기였다. 너무 황당해서 나는 사내의 제안을 자꾸만 돌이켜보았다. 결국엔 돈 때문이었다. 돈이 생기면 이사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 테고 조금 더 빨리 이 동네를 뜰 수 있을 테니까. 치킨이나 피자를 싣고 동네를 돌며 선미의 흔적을 되새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어디까지나 사내의 말이 진짜라면.

사내는 죽고 싶다고 했고, 도와달라고 했다.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살아나는 통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고 털어놓으며 사내의 두 눈에 물기가 비쳤다. 그러다

―이봐요. 그때 당신이 안 나타났으면 난 깔끔하게 죽을 수 있었다고요!

하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사내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한 번 만에 성공하면 오십만 원. 두 번 만에 성공해도 오십만 원. 세 번 만에 성공해도 오십만 원을 몽땅 가지라는 거였다. 물론 그동안 생활비로 야금야금 지출하지 않는 가정하에. 사내는

―내가 확실하게 죽으면 빨리 신고만 해주면 돼요. 어때요. 간단하죠?

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오십만 원을 가지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 덧붙였다. 그런 다음 나달나달한 만 원권 오십 장을 세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십만 원이네요.

내가 중얼거렸고 사내가

―이 오십 장이 내가 가진 전부예요.

했다. 당장 며칠 후면 월세도 내야 하고, 끊어진 도시가스도 복구해야 하고, 체납된 휴대폰 요금 때문에 압류도 들어올 테니 그 전에 죽고 싶다는 게 사내의 청이었다. 적어도 일주일 안에. 그는 달력을 가리키며

―보험이 실효되기 전에 죽어야 보험금이 나오는 건 알죠?

했다. 그러니까 꼭 그게 아니라도 사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많아 보였다. 치킨을 먹는 모습을 제외한다면 그가 살아야 할 이유는 정말이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요? 배달이 뜸한 낮 시간, 좁은 홀을 지키던 내가 질문하면 사장은 신문을 뒤적거리며

―죽는 거야 확실한 방법이 많지. 사는 데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하고 말았다. 두어 번쯤 너 죽고 싶냐? 하고 되물을 때도 있었지만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고

―죽는 것도 쉬운 게 아니야. 세상에 쉬운 게 뭐 있는 줄 아냐?

하고 비아냥거렸다. 신문지의 소음이 홀을 꽉 채우는 동안, 나는 종종 사내를 떠올렸다. 푸른 지폐 오십 장이 떠올랐고, 선미 생각이 났고 하루라도 빨리 동네를 뜨고 싶었다. 선미처럼 가볍게 이 동네를 떠나 근사한 미래를 그려보고 싶었다. 도대체 확실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공중에서 발버둥치던 사내의 실루엣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찾아보면 단 하나의 방법, 확실하고 신속한 단 하나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 어떤 가능성이 차츰 몸집을 키웠고 나는 슬그머니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나는 102호 앞에 섰다.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근처 원룸에 피자 한 판을 배달하고 돌아서는데 사내가 떠올랐다. 완벽한 방식을 찾는 대신, 실패한 방식을 보완해보는 게 어떨까. 문득 떠올랐다고 하기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사내는 한참 뒤에야 문을 열고 소곤거렸다.

―그럼, 도와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퇴근 후, 집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두 눈을 반짝이는 사내 앞에 내놓은 건 감빛 빨랫줄이었다. 사내는 줄의 끄트머리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또? 끈이네.

―그 끈은……. 손으로는 잘 안 끊어진다고 하더라고요.

날이 밝으려면 아직 서너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사내는 꼼꼼하게 줄을 매달았다. 전등을 뽑고 빈 천장 속에 손을 넣어, 단단한 지지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침내 사내가 부서진 의자 대신 어깨를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는

―아마…….

하면서 내 어깨에 한쪽 발을 올리고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면서 완전히 올라섰다. 엄청난 무게가 몸을 짓눌렀다. 내가 비명을 질렀고 사내가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한참 만에 내가 간신히 무릎을 일으켰고, 사내가 둥근 고리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아래에서 “됐어요?” 하면 위에서 “됐어요.” 하는 대답이 떨어졌다. 완전히 됐다는 신호를 들은 뒤, 나는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사내는 공중에 매달렸다. 펄럭펄럭, 마구 나부끼는 빨랫감처럼 사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사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끈을 붙잡고 두 발로 허공을 차대는 사내의 몸짓은 분명 구해달라는 신호였다. 그러니까 채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나는 다시 사내의 발밑으로 뛰어들었다. 사내의 두 발이 머리통을 무차별 가격하고 한참 만에 어깨를 찾아 디뎠다.

―괘, 괜찮으세요?

내가 물었고 사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괘, 괜찮다니까요.

했다. 그러면서도 두 발은 얌전히 내 어깨에 올려놓은 채였다. 그러니까 내가 빠져나옴과 동시에 사내의 몸이 공중에 매달렸고, 몸부림치는 사내를 보던 내가 다시 발밑으로 뛰어들었고, 어깨를 디딘 사내가 엄청난 양의 공기를 빨아들인 다음 마른기침을 토해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언제나처럼

―괜찮으세요?

하면

―전 괜찮다니까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매번 사내를 구했다. 항상 간발의 차였다. 조금만 더 내버려뒀더라면, 하는 후회는 늘 사내를 구한 다음에 찾아왔으므로 사내의 죽음은 자꾸 미뤄졌다. 마침내 사내가

―날 샜네요.

했다. 여전히 내 어깨를 디디고 선 채였다. 정말이지 천장에 바짝 붙은 창으로 희끄무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사내의 얼굴이 동그란 고리를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한꺼번에. 사내의 육중한 몸이 쏟아졌다.

―이렇게 또 하루가 시작됐네요. 정확히 딱 삼 일 남았어요.

한참 만에, 사내는 어둑어둑한 천장을 향해 중얼거렸다. 실패였다. 또다시 내 탓이었다. 날 타박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더 효과적이고 쉬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번엔 확실하게 찾아올게요.

사내에게 그렇게 약속한 뒤로 나는 종일 죽는 상상을 했다. 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누비며 공중에 몸을 매다는 방법을 제외한 모든 가능성을 꼼꼼히 살폈다. 다량의 수면제를 삼키는 방식은 구입비 탓으로 가장 먼저 제외되었고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는 방식은 투신할 만큼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적절치 않았다. 연탄불을 지피는 방식도 있었지만, 어디서 연탄을 구해온단 말인가? 매끈한 면도칼로 손목을 긋는 방식은 살아날 여지가 많았으므로 불완전했다. 사내는

―이러다가 세금으로 전 재산을 다 날릴지도 몰라요.

걱정했고

―확실할까요?

되물었다. 무엇이든 서둘러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건 살아남는 것보단 죽는 것이 여러 모로 확실했으니까. 사내의 죽음이 확인된다면 나는 오십만 원을 가지게 될 테고, 사내의 이름으로 거액의 보험금이 가족에게 전달될 터였다. 이 집엔 또 다른 사람이 이사를 올 테고, 그 사람이 치킨이나 피자를 배달하기 전에 나는 이 동네를 떠날 수 있게 될 거였다. 사내가 계속 산다면?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건 사내는 죽고 싶어 했고, 죽어야만 했고, 죽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번번이 사내가 살아남는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으니까.

건물 옥상에서 몸을 날리기로 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죽음을 확신할 만한 높이의 건물들은 모두 옥상 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사내는 커터 칼로 손목을 긋겠노라 다짐을 두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칼을 쥐고 왼쪽 손목을 노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런 다음

―이거 좀 확 그어줄 수 있어요?

하며 나를 돌아다보았다. 엉겁결에 칼을 받아들었고, 사내의 손목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사내가 했던 것처럼, 새파란 혈관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또 새삼 사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줄들은 싱그러웠고 쉼 없이 뛰고 있었다. 아마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을 터였다. 사내는 반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어서 해요.

사내가 재촉했고 내가

―잠깐만요, 잠깐만요.

하며 뾰족한 칼날로 적당한 위치와 자리를 가늠했다. 칼날이 콕콕 사내의 손목 부근을 찌를 때마다 사내는 아, 아, 했고 빨리요, 그냥 그어버려요, 하고 조급해 했다. 결국 내가 사내처럼 눈을 질끈 감은 채

―모, 못하겠어요.

할 때까지. 그리고 어김없이 날이 밝았다. 높이 매달린 창문으로 새벽을 마주하는 일은 미안하고 송구스러웠다. 사내가 방바닥에 주저앉았고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고 중얼거렸다. 보험회사나 통신사, 전기나 가스 회사에서 벼르고 벼른 최후통첩을 날리기까지 겨우 하루 정도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최대한 신속하게, 내가 사내의 죽음을 알린다고 가정한 때였다. 사내는 조급해했다. 창밖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오늘은 진짜예요. 확실히 준비하고 있으세요.

나는 물기로 반질반질한 사내의 두 눈을 외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요?

사내가 코를 들이마시며 되물었고 난 재차 다짐을 두었다. 정말, 오늘은, 확실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요. 나를 따라 일어선 사내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 올 때 치킨 한 마리 튀겨다 줄 수 있어요? 이왕 죽는 거, 한 번만 더 먹고 싶네요.

습관처럼 만 육천 원입니다, 하려던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오십만 원에서 만 육천 원을 제해야 한다는 게 아무래도 속상했지만 어쨌거나 내일이면 세상에 없을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가 살며시 문을 닫았다.

여느 때처럼 나는 종일 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누볐다. 오토바이가 지날 때마다 고소한 기름내와 치즈 냄새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흘러나왔고, 다른 오토바이가 지나며 또 다른 냄새를 남겨 놓았다. 냄새는 골목 끝까지 갔다가, 엇갈리고 마주치고 되돌아오면서 허름한 동네를 채우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은 종일 허기진 동네일지도 몰랐다. 누군가 피자 상자를 접어버리는 동안, 누군가는 치킨 집으로 전화를 걸고, 누군가는 자장면을 삼키고 있을 테니까. 나는 다닥다닥 붙은 창들을 흘끔거리며, 아직 살아 있는 사내를 생각했다.

사내는 문을 열자마자 치킨부터 받아들었다. 언제나처럼 날개 먼저 그 다음 다리 두 개를 뜯어 먹으며

―정말 오늘은 성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되물었다. 나는 검은 봉지에서 연탄 하나와 번개탄 하나를 꺼냈고 이번엔 정말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니까 단언하고 싶어졌다. 오늘은 사내가 죽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오늘도 죽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슬며시 몸집을 키웠다. 어떻게든 사내를 돕고 싶었다.

―오늘은, 오늘은, 성공해야지요. 아마.

―정말이지 오늘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청테이프로 창문 틈새를 메우고 현관문 손잡이를 둘둘 감을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내가 방 한가운데 연탄과 번개탄을 놓고 불을 피울 때까지도. 불이 좀처럼 붙지 않았고 서너 차례 시도하는 동안, 사내는 남은 치킨 부스러기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내가 마른 종이를 연탄구멍에 밀어 넣었고 곧 불이 붙었다.

―근데 조금만 더 있어줄 수 있어요?

연탄이 타면서 장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있다 나가요. 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실 테니까. 얼마 안 걸릴 거라고요.

사내는 배를 한껏 부풀려 숨을 쉬었다. 말하자면 죽지 않을 만큼만 버티다 나가달라는 부탁이었다. 헐겁게 붙여진 테이프를 떼어내고 현관문을 열면 바로 바깥이었다. 나는 문 앞에서 조금만 더 버티다 나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사내는 문을 잠글 것이고 테이프로 문을 봉할 것이었다. 나는 십여 분을 기다리다 경찰에 신고만 하면 될 터였다. 정신을 잃기 전에 재빨리. 나는 수시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고, 그보다 더 자주 희미하게 지워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기침이 터졌고 눈이 따끔해질 때까지도 사내는

―아직 거기 있죠? 있죠?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현관문 바로 앞에서였다.

다시, 사내였다. 눈을 떴을 때, 커다란 사내의 얼굴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아났네요.

사내는 곤혹스러운 듯 얼굴을 잠깐 찌푸렸다. 사내도 나도 환자복을 입은 채였다. 나는 뒤늦게야 우리의 시도가 또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다시금 내 탓이었다. 얇은 커튼 너머로 간이침대 굴러가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비명과 흐느낌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멀어지기도 했다.

―응급실인가 보죠?

대답 대신, 사내는 몸을 숙여 내 귓가에 마른 입술을 바짝 갖다 댔다.

―이대로 발 빼진 않을 거죠?

가장 먼저 사내는 그렇게 물었고 이어

―이젠 빼도 박도 못해요. 엉망인 집까지 수리해주게 생겼다고요.

소곤거렸다.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를 돌아 몽롱한 머릿속에 똑똑 떨어졌다.

―이제 정말, 성공하는 수밖에 없어요.

의사는 가벼운 일산화탄소중독 증세가 의심된다는 처방을 내놓았고 사내와 나는 나란히 고압산소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 며칠 더 입원할 것을 권했지만 사내도 나도 응급실 비용을 대느라 여윳돈이 바닥난 상태였다. 죽었으면 쥐게 될 오십만 원을 살아 있는 탓에 몽땅 날린 셈이었다.

병원 건물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환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사내와 나란히 걸었다.

―있다가 올 거지요?

가끔씩 어지럽고 메스꺼운 느낌이 치솟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사내와의 약속은 지키는 게 옳았다. 게다가 이제 사내는 내 목숨을 구한 은인이 아닌가. 나는

―치킨은요?

하고 물었고 사내는

―죽기 전에 한 번 더 먹을 수 있음 좋지요.

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꼭 그 치킨이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정말, 오늘은, 확실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해요. 내가 다짐하고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나 그제처럼 나는 또 동네를 뱅글뱅글 돌며 확실한 죽음의 방식을 찾아 헤매야 할 것이었다. 오늘은 정말 찾을 수 있을까. 고개를 들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한꺼번에 고꾸라질 것처럼 가파른 풍경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나란한 보폭으로 다시 동네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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