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이 살육작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1, 2명씩…. 나중에는 무더기로 젊은이들과 학생들을 잡아왔다….’
2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 중에는 당시 시민 4명이 눈물로 쓴 일기장도 포함됐다.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의 운전사였던 주이택 씨(62)는 5·18 다음 날인 1980년 5월 19일 광주 금남로 가톨릭센터 6층에서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지켜봤다. 주 씨는 일기에 “(군인들이)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내려치니 (젊은이들이) 실신하다시피 해 차에 실려 갔다. 인간이 아니라 개나 돼지를 때려죽이는 것 같다”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당시 광주우체국 통신과장으로 근무했던 조한유 씨(74)는 금남로에서 대학생 3명과 나눈 대화를 일기장에 적었다. ‘대학생들은 총이 없을 때는 무력했지만 이젠 대항력이 있다고 말한다. 또 젊은 남녀가 죽고 희생돼 부모님과 시민들이 합세할 것이라고 믿었다. (비폭력 시위를 하자는 설득에) 너무 깊이 빠진 느낌이지만 조만간 좋은 타결이 있을 것 같고 뜻이 반영되지 않으면 한 몸 희생하겠다는 각오다.’
당시 여고생으로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에게 밥을 지어줬던 주모 씨(48)는 “상황실에서 총기를 회수하고 사태를 수습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부 반발로 총기를 회수하지 못했다. 부지사실에서 자고 있는데 오빠들이 와 깨웠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으니 살고 싶은 사람은 피하라고 해 피신했다. 많은 군인이 투입돼 전남도청이 점령됐고 민주화를 부르짖던 시위도 끝났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일기에 적었다.
당시 목포전화국 직원으로 일했던 조한금 씨(68·여·동아일보 목포주재 기자 최건 씨 부인)은 “(진압군이 광주를 점령한 후) 광주는 평정을 되찾아간다는 선전방송이 흘러나왔다.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 당국 등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언제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라고 당시 심경을 기술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이 일기장은 당시 상황을 시민의 눈으로 기록한 역사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개인의 일기가 아닌 국가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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