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번째 귀화인, 로이 알록 꾸마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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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4일 21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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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회의실에서 열린 귀화자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이귀남 법무부 장관(왼쪽)이 10만 번째 귀화 허가자인 인도 출신 로이 알록 꾸마르 부산외국어대 교수에게 태극기와 국적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과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4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회의실에서 열린 귀화자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이귀남 법무부 장관(왼쪽)이 10만 번째 귀화 허가자인 인도 출신 로이 알록 꾸마르 부산외국어대 교수에게 태극기와 국적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과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꽃이 피면 벌이 모입니다. 그러나 벌이 들어오지 않으면 열매도 맺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외국인에게 좀 더 개방적인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63년 만에 10만 번째 귀화인으로 등록된 로이 알록 꾸마르 부산외국어대 교수(55·인도어과)는 2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귀화증서를 받은 뒤 이렇게 말했다.

로이 교수는 1979년 인도 델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1980년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인과 결혼해 두 딸을 낳으며 1985년 서울대 외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89년 부산외국어대 교수로 부임한 그가 31년 만에 한국인이 된 것이다.

한국은 그에게 제2의 조국이지만 섣불리 귀화를 결정하지 못했다. 인도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데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문화 때문이었다. 그는 부산발전연구원 자문위원, 부산일보 독자위원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지만 외국인이란 이유로 연구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없었고 지원금을 받기 어려웠다. 심지어 인터넷 사이트 하나 가입하는 것조차 외국인 신분으로는 어려웠다.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한 두 딸도 그에게 "우리는 한국 100%, 인도 100%를 합치면 200%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사람들은 우리보고 50%만 한국인이라고 말한다"고 토로할 때가 많았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의 가슴은 미어졌지만 그렇다고 딸들을 위해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한국이 좋았다. 주변에서는 동북아정치를 공부하려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남들이 다 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생각이 컸고 무엇보다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어요," 그는 이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당시 인도인들에게도 낯설었던 한국은 그에게 '블루 오션'이기도 했다.

로이 교수가 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외국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문화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유입이 늘고 다문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문화도 많이 사라지게 된 것. 한국 사회의 이런 변화는 로이 교수의 생각도 바꿨다. 그는 이제 "국적 자체가 어디 있는 게 중요하지 않고 내가 밟고 있는 땅에 대한 고마움만 있으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는 "한국의 담을 넘어 마당까지는 들어왔는데 '안방 열쇠'를 차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제가 귀화에 성공한 것은 한국 사회가 선진화된 결과이고 소외 받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살려준 일이라 생각한다"고 지난 31년을 회고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제화는 대단한 게 아니라 '마음의 다문화주의'라고 생각해요.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유럽의 부국 룩셈부르크가 외국인들의 활약 없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한국 사회는 좀 더 열려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로이 교수는 해외 우수인재 등에게 복수국적을 허용한 개정 국적법이 올해부터 시행됨에 따라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인도 국적법에 따라 곧 인도 국적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는 그동안 최인훈의 '광장'을 부산외국어대 노영자 교수와 함께 힌디어로 번역해 2005년 출간하는 등 인도에 한국을 널리 알리는데 힘써왔다.

앞으로는 한국에 인도를 널리 알려볼 생각이다. 한국인이 된 그의 꿈은 인도 관련 연구소를 세워 인도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 "타고르는 벵골어로 시를 썼지만 한국에 들어온 타고르의 시는 일본어나 영어를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에요. 타고르와 인도를 제대로 알려면 벵골어로 된 타고르의 시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요? 타고르의 문학이 언어의 차이 때문에 정신이 퇴색되는 것도 있거든요. 연구소를 세운다면 이런 일들을 해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더 재미있고 알차게 연구할 수 있겠죠?"

한국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 그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과천=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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