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116>‘愛人敬天’ 도전 40년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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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스스로 크는 나무가 건강하다
집에서나 회사서나 ‘자율’ 강조
아이들 일 스스로 결정하도록해
회사일도 대부분 실무자에 맡겨

존중과 함께 자녀 교육의 또 다른 원칙은 자율이었다. 큰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모든 결정을 알아서 선택하게 했다. 현실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관심을 보일 시간이 없었고,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므로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하는 방법을 스스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하고 앞날을 설계해 학업을 마쳤다. 큰아들(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은 미국 보스턴대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쳤다. 보스턴대에서 공부할 때는 재학 중인 동양인 학생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미국 교수에게 미래의 교수감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그러나 2년이 채 안 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큰아들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뒤 형식적으로 우리 집의 호주가 됐고, 실제로도 아버지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 가장 역할을 했다. 다른 형제가 마음에 걸리는 일을 했을 때는 어머니에게는 말해도 큰형에겐 말하지 말자고 공모할 정도였으니 장남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큰형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보며 자란 동생들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큰아들이 회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내가 경영을 맡으라고 권유해서가 아니었다. 애경그룹은 남편이자 아이들 아버지의 유업이고, 크면 물려주기 위해 내가 맡아 키웠지만 어떤 일이 맞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결국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회사에서도 대부분의 일을 실무자에게 맡기는 편이다. 나보다 해당 분야에서 더 오래 일한 실무자가 더 잘 알고, 자율적으로 일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애경백화점(현 AK플라자 구로본점) 출범 시 스포츠센터가 생기면서 나는 1주일에 한두 차례 수영을 하러 다녔다. 담당자에게서 “이제 죽었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결정적인 게 아니면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다. 자주 가고 눈에 띈다고 매번 지적을 하면 임직원이 소신껏 활발하게 일하기 힘들다.

나는 모두 7명의 손녀와 손자를 두었다. 손녀 손자를 키우는 모습을 지켜보니 내가 키울 때처럼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강요하는 일이 적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선지 손녀와 손자도 예의 바르게 잘 자랐고, 성인이 된 손녀도 할머니인 나에게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며 친하게 지낸다. 내 아이들의 어릴 적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아쉬움 때문인지 나는 처음 할머니가 된 이후로는 손녀와 손자 보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지금은 20대 중반의 숙녀로 성장한 장손녀 문선(채형석 총괄부회장의 장녀)이에게 어릴 적 내 사무실을 구경시켜 준 적이 있다. “여기가 할머니 방이다. 이렇게 책상에 앉아 일도 하고 책도 보지.” 손녀는 “할머니는 좋은 차 타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숙제도 안 해도 되니 좋겠다”면서 할머니 사무실이 퍽이나 부러운 눈치였다. 나는 “네가 숙제하기 싫은 것처럼 할머니도 여기서 하기 싫은 일이 많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게 노력해서 물건을 만들고 시장에서 팔아 회사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는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손녀의 눈을 보며 나는 한국을 짊어질 많은 여성 후배를 떠올렸다. 누가 여자로서 사장을 하면서 어려운 점을 물어오면 “나는 남자들에게 잘 얹혀살고 있다. 하지만 얹혀사는 것도 공짜가 아니다”며 농담처럼 말한다. 6명이나 되는 내 손녀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에게 사회는 녹록하지 않다. 그럼에도 여성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 노력에 따라 그들의 인생은 물론이고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여성이 꼭 유념하도록 조언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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