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양천향교 ‘87세 호랑이 훈장님’ 26년간 한자교육

  • 입력 2009년 4월 24일 03시 02분


아담한 한옥 지붕 아래 “하늘 천, 따 지” 하며 천자문을 외우는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와 “마음을 바르게 써야 글이 바르게 써지는 게다”라는 훈장님의 따끔한 호령이 터져 나오는 곳. 지리산 청학동 마을이나 산골짜기가 아니라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 있다. 강서구의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서울의 유일한 향교인 ‘양천향교’가 바로 그곳이다.

○ 양천향교에는 ‘호랑이 훈장님’이 산다

“훈장님, 여기 한자쓰기 숙제요.” 23일 오후 양천향교에 도착한 어린이들은 훈장님께 꾸벅 인사를 하더니 노트를 내밀었다. 아이들이 쓴 한자를 꼼꼼하게 검사한 훈장님은 펜을 들고 다음 날까지 적어 와야 할 한자를 정성 들여 써줬다. 숙제 검사가 끝난 뒤 아이들은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훈장님 앞에서의 천자문 암송이다.

“화채선령(畵彩仙靈). 그림 화, 채색 채….” “신선 선, 신령 령. 똑바로 공부를 안 했구나.”

조금이라도 막히면 가차 없이 불호령이 떨어진다. 숙제를 제대로 안 해왔을 때뿐 아니라 인사를 제대로 안하거나 뛰어다니는 등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도 훈장님은 봐주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훈장님에게 혼이 나도 아이들의 얼굴엔 섭섭한 표정이 없다. 훈장님의 불호령 속에 애정이 담겨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양천초등학교에 다니는 변민석 군(9)은 “훈장님이 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기 와서 배우는 시간이 좋다”고 답했다.

양천향교의 호랑이 훈장, 오남주 할아버지(87)가 아이들에게 한자와 예절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83년부터다. 4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자 등을 배웠던 그는 양천향교의 훈장이 돼 서당과의 인연을 이어 가고 있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2기(1989년) 졸업생인 오 할아버지는 초중학생들에게 한자와 충효교육을 시키며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항상 이곳에 머문다.

아이들을 가르친 세월도 20년이 넘어가다 보니 달라진 점도 적지 않다. “부모들이 이제 더는 ‘사랑의 매’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회초리는 들지 않죠. 그래도 아이들에게 위엄은 지켜야 하기 때문에 회초리를 가지고는 있습니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상대하려면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가 매일같이 아이들과 씨름을 하고 예절교육을 시키는 것은 바로 보람 때문이다.

그는 “가끔 ‘오늘은 훈장님이 무엇을 가르치셨기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예의 바르고 말도 잘 듣는 거죠?’ 하고 전화가 올 때가 있다”며 “길 가다가 만나는 제자들의 인사, 양천향교 덕분에 아이들이 순하고 예절 바르다는 동네 주민들의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 봄, 가을이면 석전제 열려

양천향교는 1411년 태종 12년에 창건해 일대 유생과 제자 등을 양성하던 곳이다. 향교 안에는 공자 등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교육 장소로 사용되는 명륜당, 제사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 학생들이 머물렀던 동재와 서재 등 5동의 건물이 있다.

봄, 가을이면 공자를 추모하는 제례 ‘석전제’가 치러진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석전제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한 27현(동양 5성, 송조 4현, 동국 18현)을 추모하고 덕을 기리기 위한 행사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初丁日)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에서 일제히 치러지는데 서울에서는 양천향교와 성균관에서 재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양천학교 서당은 월 5만 원에 신청을 받아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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