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 필립 커시 재판소장

  • 입력 2008년 11월 20일 03시 00분


“反인륜범죄 세계가 함께 맞서야 평화 지킨다”

인종청소와 대량학살, 집단강간, 고문….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상 어느 곳에선가 계속되고 있는 참상들이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수십 년간 지속돼 온 내전이 공식 종결된 지 5년 만에 다시 정부군과 반군의 유혈 충돌이 벌어져 25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과거 전범에 대한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콩고는 다시 ‘살육의 땅’으로 변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국제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시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콩고 난민들의 피란 행렬이 줄을 잇던 이달 초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를 방문해 필립 커시 ICC 재판소장을 만났다.

ICC는 대량학살 같은 반인륜 범죄 등을 처벌하기 위해 2003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최초의 독립 상설재판소. 마침 올해는 이 재판소 설립의 근거가 된 ‘로마규정’ 제정 10주년이자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그동안 ICC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나.

“ICC 설립이 논의된 시기는 캄보디아와 발칸 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집단범죄가 횡행했던 시기이다. 이런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정의를 세울 수가 없었다. 국제사회는 임시 재판소를 세워 대응에 나섰지만 이는 특정 지역의 특정 사건에 국한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는 공감대 속에서 나온 것이 ICC다. ICC는 수사와 예심, 본심, 상고심의 4단계를 거친다. 예상보다는 빨리 정착해 업무가 본궤도에 올랐다. 콩고의 반군 지도자 토마스 루방가는 현재 예심 단계에 있다.”(ICC는 18일 루방가에 대한 본심공판을 내년 1월26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ICC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극악 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콩고를 보라.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또 어느 기관 하나의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전 세계가 함께 협력해야 하고 ICC를 비준한 회원국의 적극적인 지지도 필요하다. ICC의 활동이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가져오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다만 지금도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들이 ICC의 존재를 의식한다고 본다. 이미 존재 자체로 예방 효과가 있다. 결국 ‘절반의 물’ 같은 것이다. 물이 이미 반이나 찼다고 볼 수도 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ICC 건물 밖은 소란스러웠다. 흑인 수십 명이 몰려와 자신들이 지지하는 용의자를 체포한 데 대해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피고인들이 분쟁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거물이다 보니 ICC는 각종 정치적 압력과 항의에 시달린다.

―ICC 수석검사가 7월 다르푸르 사태와 관련해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한 것을 놓고 논란이 많다. 실효성은 없으면서 수단 내 국제평화유지군의 활동만 더 어렵게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 드디어 정의를 바로 세웠다는 격려와 칭찬부터 그 반대의 이야기까지 모두 나온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은 없다.”

―ICC가 활동하는 데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 있나.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기관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많다. 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재판을 해야 하고 재판관과 직원들의 안전, 피해자와 증인의 보호 문제 등도 있다. ICC는 개별 국가의 사법기관과 달리 경찰의 공권력이나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한계도 있다. 중요한 한 축이 빠져 있다. 이를 강제하고 실제 집행단계에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은 공권력을 가진 개별 국가이다.”

―강대국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미국은 아직 ICC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는 미국의 협조가 없다고 해서 업무에 지장을 받는 것은 없다. 미국의 비준 여부와 상관없이 아프리카 지역 범죄 등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ICC가 발전하려면 더 많은 회원국의 참여와 협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과거보다 더 많은 국가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 국가 등 비준국도 늘어나는 추세여서 현재 180개국에 이른다.”

ICC는 최근 일본인 사이가 후미코(齋賀富美子) 씨를 재판관으로 선임했다. 이 밖에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송상현 재판관이 5년째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상고심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최근 아시아 재판관의 활동이 눈에 띈다.

“두 명의 아시아 재판관은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재판소에서 아시아의 역할은 아직 작다. 일단 아시아에서 ICC를 비준한 회원국 수가 적고 개별 기관에서도 판사가 적어 지역 대표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각종 인권유린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 ICC에서 처벌이 가능한가.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더구나 정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 다만 지금까지 설명한 원론적인 내용을 통해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모든 사건은 ICC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진행될 수 있다.”

헤이그=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필립 커시 재판소장:

△1948년 벨기에 출생(현재 캐나다 국적)△1990년 스웨덴 주재 캐나다 대사

△1993년 전쟁 희생자 보호를 위한 국제회의 초안위원회 의장

△1997년 테러 억제 위한 유엔 임시위원회 의장

△1998년 캐나다 퀘벡 주 왕립변호사(QC)

△1998년 ICC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 준비회 의 의장

△1999년 ICC 예심 부장

△2003년 ICC 재판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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