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한국 첫발

  • 입력 2005년 4월 4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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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5일. 부활절이었던 그날, 당시는 제물포로 불리던 인천항에 한 척의 배가 입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엔 벽안(碧眼)의 동년배 미국인 선교사 두 명과 가족이 함께 타고 있었다. H G 언더우드(한국 이름 원두우·元杜尤·1859∼1916)와 H G 아펜젤러(1858∼1902).

1884년 12월 미국을 출발한 지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 하나님의 자녀인 이 백성에게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

종교색 짙은 기도였지만, 이들은 진정 조선의 빛이 되었다. 서울 새문안교회 설립, 한국어 문법책의 영어 번역, 각종 성경의 우리말 번역,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설립(이상 언더우드), 서울 배재학당 설립, 서울 정동제일교회 설립, 한글 장려운동, 독립운동 지원(이상 아펜젤러) 등 이들의 활동은 근대의 길목을 밝게 비춰주었다.

이들의 한국사랑은 가족으로 확산되었다. 언더우드의 부인 L S 호턴(한국 이름 호돈·好敦)은 광혜원 의사와 명성황후 시의(侍醫)로 인술을 펼쳤고, 언더우드 2세(한국 이름 원한경·元漢慶)는 3·1운동 당시 일제의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폭로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도 했다. 아펜젤러의 딸인 A R 아펜젤러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며 이화여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들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배를 타고 전남 목포시로 가던 중 충돌사고로 익사했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언더우드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1916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매일 9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하다 건강이 악화되었고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던 중 그해 10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은 죽어서도 한국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 그 한국 땅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언더우드의 유해는 1999년 미국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고 아펜젤러의 경우 묘 대신 추모비가 세워졌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일가의 묘역도 조성돼 있다.

아펜젤러의 딸 A R 아펜젤러의 묘비명이 인상적이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그들은 분명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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