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3월 다섯째주

  • 입력 2004년 3월 28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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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통치 수단으로 설립됐던 조선식산은행은 광복 뒤 경영난으로 고전하다 1954년 4월 1일에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신인 한국산업은행이 창립 당시 본점으로 사용했던 식산은행 본점.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제의 식민통치 수단으로 설립됐던 조선식산은행은 광복 뒤 경영난으로 고전하다 1954년 4월 1일에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신인 한국산업은행이 창립 당시 본점으로 사용했던 식산은행 본점. -동아일보 자료사진
▼三十七年 만에 어제 殖産銀行 看板 내려▼

적치 대정 七년 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하여 창설된 조선식산은행은 작 三월三十一일 창립 三十七년 만에 폐쇄를 보게 되었고, 금 一일부터 재건 단계에 있어서의 장기산업자금 융자를 담당하기 위하여 새로이 산업은행의 창립 발족을 보게 되었다.

과거 三十七년 동안 한때는 왜정 치하에 있어 동척(東拓)과 함께 한국에 대한 대표적인 착취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여 왔고, 해방 후에는 정부 보증 융자와 수리자금 기타 산업자금 공급에 힘써 온 식은(殖銀)은 해방 전후를 통하여 허다한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며 그 반면 어려운 자금난을 타개하면서 산업금융에 다소나마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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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죄의 경중은 좌우간에 이제 식은은 완전히 해산을 보았다.

<동아일보 1954년 4월 1일자에서>

▼일제 착취의 상징 식산은행 폐쇄▼

조선식산은행(이하 식은)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와 더불어 일제 때 한국인의 미움을 산 대표적인 착취기관이었다. 1926년 나석주 의사의 동척폭탄투척사건도 사실 식은에 먼저 폭탄을 던진 뒤 곧이어 동척으로 달려가 폭탄을 던져 일본인을 사살한 사건이었다.

1918년 한성농공은행 등 5개 은행을 모체로 설립된 식은은 한국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한 금융기관이었다. 한국 농민을 소작인으로 부려 연간 80만석의 수확고를 올렸던 불이흥업주식회사, 경기 김포군과 황해 연백·벽성·수안·신계군 등에 대농장을 갖고 있던 조선개척주식회사, 한국 쌀의 대일수출 촉진을 위해 설립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등에 식은의 자금이 대거 지원됐다. 1938년 일제가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부터 식은은 전비 조달기관이 됐다. 식산채권을 발행해 그 대금을 모조리 일본 대장성 예금부로 넘겼던 것.

식은은 일제 패망 후에도 1950년 ‘한국식산은행’으로 개명하고 한동안 생명을 이어갔다. 6·25전쟁 등으로 일제하 금융제도의 개편 작업이 지지부진했던 탓이다. 그러나 휴전 이후 금융제도개편 작업이 재개됨에 따라 식은은 대출 잔액과 부동산 동산 등을 새로 설립된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은)에 넘기고 문을 닫게 됐다.

창립 당시 산은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 140의 1번지(현 롯데백화점 신관 자리)의 식은 본점 건물을 간판만 바꿔 단 채 본점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그 뒤 산은은 사회간접자본과 중화학공업 등에 필요한 장기자본을 공급하며 한국 산업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니, 전신인 식은의 오욕을 갚았다고 해야 할까.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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