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선생 기린 '일석 국어학賞' 제정

  • 입력 2003년 6월 5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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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 이희승은 자신의 수필제목처럼 청렴과 지조를 지키는 ‘딸깍발이’ 선비의 삶을 살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석 이희승은 자신의 수필제목처럼 청렴과 지조를 지키는 ‘딸깍발이’ 선비의 삶을 살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89년 6월9일, 아흔 세 번째 생일을 맞은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1896∼1989) 선생은 서울 동숭동 자택을 찾아온 제자들과 친지 앞에서 평생 마음 한구석에 품어왔던 계획을 내비쳤다. 국어학자를 위한 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석은 사재 2억원을 기금으로 내놓으며 상을 제정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석은 “국어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개 생활이 어려우니 얼마 되지 않은 상금이라도 요긴하게 쓰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이를 바탕으로 상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평생 올곧은 선비로 살아온 그에게 어쩌면 ‘세상물정’은 남의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일석은 그해 11월 눈을 감았다.

국어학계의 태두인 일석은 서울대 교수와 문리대학장, 대구대 성균관대 대학원장 및 동아일보사 사장, 인촌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일제하인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한글맞춤법 통일안 강의(1946)’ ‘국어학개설(1955)’ ‘국어학논고(1959)’ ‘국어대사전(1961)’ ‘한글맞춤법 강의(1989)’ 등의 저서로 국어 발전과 연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또 청렴과 지조의 남산골 샌님을 묘사한 수필 ‘딸깍발이(1956)’를 통해 선비의 본을 제시했고 스스로도 평생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올곧은 학자로 지내왔다.

일석이 작고한 지 14년 만에 비로소 그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게 됐다. 최근 제정된 일석국어학상의 제1회 수상자로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65)가 선정돼 10일 오후 6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이 교수는 ‘한국의 언어’ ‘사회언어학’ 등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해 국어학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일석국어학상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석학술재단이 제정한 상. 일석의 아들인 이교웅씨(76·의학박사)와 제자들이 모여 지난해 10월 일석학술재단을 설립했다. 이씨가 이사장을 맡고 전광현 단국대 명예교수, 정명환 가톨릭대 대우교수, 정연찬 서강대 명예교수,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승욱 서강대 명예교수, 이기문 김완진 안병희 서울대 명예교수, 남풍현 단국대 명예교수, 이종석 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상무이사, 박영재 연세대 교수, 민경환 이지순 서울대 교수, 사학자 김기협씨 등이 이사로 참여했다. 일석국어학상 시상식은 앞으로 일석이 이 상의 제정 의지를 밝힌 날이자 그가 태어난 날인 매년 6월9일을 즈음해 열릴 예정이다.

이처럼 뒤늦게나마 일석학술재단이 설립되고 학술상이 제정된 것은 부친의 뜻을 따르려는 이씨의 효심 덕분이었다. 산부인과 의사인 그는 지난해 재산을 처분해 기금을 만들었으며 최근 동숭동 집터에 일석기념관을 짓고 있다. 이씨는 이 기념관을 재단에 기증할 예정이다.

이씨는 “앞으로 여건이 허락하면 ‘일석저작상’을 추가해 젊은 학자들에게도 혜택을 주고 싶다”며 “선친의 말씀처럼 ‘살림이 나아질 정도’의 상금은 아니지만 국어사랑 정신을 기리는 상이라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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