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전문성 갖춘 사외이사 찾기 힘든데… 선진국은 임기제한 유례없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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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사외이사 내년 줄사퇴 우려

“어디에도 없는 법을 만들려는 이유도, 근거도 모르겠습니다.”

3일 서울 전국경제인연합회 콘퍼런스센터에서 국내 5개 경제단체 주최로 열린 ‘시행령 개정을 통한 기업경영 간섭, 이대로 좋은가’ 세미나에서 만난 한 재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법무부의 당초 계획대로 상법 시행령 개정안이 연내 시행되면 한국은 세계 주요국 가운데 법으로 기업 사외이사의 임기를 제한하는 유일한 나라가 된다”며 “사외이사 자격의 핵심은 전문성이고, 전문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는 법인데 한 회사에서 6년, 계열회사로 옮겨도 총 9년이 지나면 강제로 그만두게 하는 법의 취지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 발등에 불 떨어진 기업들

동아일보와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 공동 분석 결과 국내 59개 대기업 집단의 사외이사 중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는 인원은 총 92명이고, 상장된 중소·중견기업까지 확대하면 기업들은 총 718명의 사외이사를 내년에 새로 선임해야 한다. 대기업에 비해 급여가 낮고 인지도가 떨어지는 중소기업일수록 사외이사 선임에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삼성SDI는 내년 3월까지 사외이사 전체(4명)를 새로 구해야 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홍석주 로커스캐피탈파트너스 대표 등 사외이사 4명이 모두 6년 임기를 채우기 때문이다. 셀트리온도 내년 3월이면 사외이사 6명의 임기가 모두 6년을 넘는다. 삼성SDS, 카카오, 만도는 내년 초까지 사외이사를 3명씩 새로 구해야 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좁은 인력풀에서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를 1명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번에 여러 명을 교체해야 한다니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며 “동종 업계 경쟁사에서 임기를 채운 사외이사들을 모시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사외이사 임기 제한 국가가 어디 있나”

정부가 상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이유는 사외이사가 임기가 길어질수록 기업과 유착해 제대로 조언하지 못하고 거수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계는 장기간 재직해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가 경영에 참여해야 경영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는 등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법원이 배임이나 횡령, 손해배상 등 경영상 문제가 발생하면 사외이사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묻고 있다. 누가 ‘거수기’ 역할만 하겠는가”라며 “민간기업 임원은 공무원이 아닌데 단순히 임기를 채웠다고 전문가를 쫓아내라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고 지적했다.

실제 사외이사 제도가 가장 먼저 시작된 미국을 비롯해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 사외이사의 임기를 법으로 제한하는 국가는 찾기 힘들다. “일정 기간 동안 해당 기업이나 그룹에 종사한 이력이 없어야 한다” “회사와 금전적 이해관계를 가진 회사에 대한 소유권이 없어야 한다” 등 선임 요건만 두고 있을 뿐이다. 2000년에 애플의 사외이사로 이사회에 합류한 아서 레빈슨 이사회 의장(전 제넨테크 최고경영자)은 동시에 맡고 있던 구글 사외이사를 2009년에 그만뒀다. 구글이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애플과 경쟁구도가 되자 사외이사의 경쟁사 겸임을 금지한 규정에 따라서이지 임기 제한 때문이 아니다. 미국 기업지배구조 전문기관인 GMI레이팅스에 따르면 미국 시가총액 상위 3000개 기업의 사외이사 중 약 30%가 10년 이상 근무하고 있다. 글로벌 가구회사 레깃&프렛에는 1969년부터 50년째 사외이사를 맡아온 인사도 있다.

유환익 한경연 혁신성장실장은 “불필요한 규제가 남발되면서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에 쓸 자금을 경영권 방어에 낭비하고 있다”며 “경영환경을 이렇게 만들면 기업가 정신이 훼손되고 기업들의 투자 의지도 꺾여 결국 국내에 만들어질 일자리를 해외에 빼앗기지 않겠나”라고 우려했다.

서동일 dong@donga.com·유근형 기자
#대기업#사외이사#줄사퇴#상법 시행령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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