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北 최고 엘리트 사이에선 무슨 일이? [청년이 묻고 우아한이 답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9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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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미사일 발사 움직임을 보이면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을 통해 외신 기자회견을 여는 등 미국에 대한 불만을 다양한 창구를 통해 표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 내 정치의 최고지도부에서는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고 이것이 앞으로 북미 비핵화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을까요?

-노태구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13학번(서울대 한반도문제연구회)

A. “대화가 잘될 때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삐걱거리면 곧바로 당 조직지도부가 검열에 들어갑니다. 핵문제의 기술적인 부분을 잘 모르는 김정은과 김영철이 잘못 내린 결정이 많을 텐데, 김정은 지시에 따른 것이라도 책임은 김영철이 지게 됩니다. 최고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김정은은 뒷짐 지고 모른 체하겠죠.”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지난해 5월 27일 기자와 만나 한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1차 정상회담 직전이었고, 양국의 실무접촉이 활발하게 진행될 때였습니다. 태 전 공사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정말 내공이 있고 학문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만, 이 글을 쓰기 위해 당시 발언을 돌이켜보면서 그의 내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 11월 서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신석호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장(당시 국제부장·오른쪽)과 인터뷰하고 있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17년 11월 서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신석호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장(당시 국제부장·오른쪽)과 인터뷰하고 있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실제로 지난달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일행이 평양으로 돌아온 이후 한 달이 되어가지만 협상 개최의 선봉에 섰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10일 북한 전역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대의원 선거 후보자 명단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그가 공개활동을 했다는 보도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정확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잠적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태 전 공사는 당시 “정치군인에 불과한 김영철이 북-미 외교와 남북 관계 총책이라는 분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지만, 나중에 숙청될 운명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추정의 역사적 근거들은 지난해 4월 출간된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넘쳐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대남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최승철(통일전선부 부부장)과 뒷선에서 지휘했던 한시해(전 유엔 주재 대사)와 권희경(전 주러시아 대사),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 관계에 발을 들였던 류경(국가보위부 부부장) 등도 숙청됐습니다.

김정은이 이번 회담 결렬의 희생양을 내세워 처벌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북한 내부에 비핵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최선희 부상은 15일 평양에서 열린 외신기자회견에서 군부와 군수업체들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비핵화 반대 의사를 표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실 우리 인민들, 특히 군부와 군수공업 부문은 우리가 절대로 핵을 포기하면 안 된다면서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 수천 통의 청원 편지를 올리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최고지도자가 내부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미국과의 협상에 나섰음을 강조하면서 미국에 책임을 돌리려는 맥락에서 평양 내부 분위기를 전한 것입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가운데)이 15일 평양 주재 외신 기자와 외교관들을 상대로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평양=AP 뉴시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가운데)이 15일 평양 주재 외신 기자와 외교관들을 상대로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평양=AP 뉴시스


김 위원장에게 청원을 올렸다는 이른바 ‘북한 보수’ 세력의 위력은 상당합니다. 2000년대 초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7·1경제관리 개선조치와 종합시장 도입이라는 제한적인 경제개혁 정책을 단행했을 때 이들은 불평등이 심화되고 북한 사회주의의 평등 가치가 무너진다며 조직적으로 반발해 결국 김 위원장이 개혁조지를 되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현재 북한 주민들에게는 국제사회의 제재 유지로 인한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불만이 퍼져나가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핵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청원과는 반대되는 것이지요. 핵을 포기하고 제재를 풀어 경제난을 덜어달라는 주민들의 청원이 비록 공개적으로 표출은 되지 않더라도 눈빛에서 눈빛으로 확산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북한 주민들의 경제난과 함께 내부 보수층의 반(反) 김정은 여론이 결합하면 통제하기 힘든 상황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객관적인 상황은 김정은과 그를 둘러싼 엘리트 지배층이 매우 힘든 선택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미국이 제재 완화 등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 유예(모라토리엄)에 대한 상응조치를 내놓지 않을 경우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 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는 외교적인 조치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다시 ‘핵무력’을 강화하는 방향을 암시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4월 15일 김일성 주석 생일 등 내부정치적인 일정에 맞춰 모라토리엄을 깬다면 미국과 국제사회의 더 강한 제재를 맞이하게 됩니다. 상대방인 미국은 하노이 회담 결렬을 계기로 강경한 대북정책 기조를 다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평양의 고민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신석호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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