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은 ‘100도 물폭탄’ 1기 신도시에 집중… 강남 일부에도 깔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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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구멍난 국민안전]‘땅속 시한폭탄’ 노후 온수배관

5일 오전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백석역 인근 온수배관 파열 사고 현장에서 한국지역난방공사 관계자들이 복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전날 오후 8시 41분경 발생한 이 사고로 1명이 숨졌고 23명이 다쳤다. 고양=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5일 오전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백석역 인근 온수배관 파열 사고 현장에서 한국지역난방공사 관계자들이 복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전날 오후 8시 41분경 발생한 이 사고로 1명이 숨졌고 23명이 다쳤다. 고양=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4일 오후 8시 41분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백석역 주변에 있던 시민들 눈앞에 펄펄 끓는 물기둥이 치솟았다. 도로 밑 지하 2.5m에 매설된 지름 85cm의 온수배관이 터지면서 95∼110도의 뜨거운 물과 수증기가 지상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난데없는 ‘100도 물폭탄’에 송모 씨(68)가 숨지고 23명이 화상을 입었다.

1991년 만들어진 이 온수배관은 27년 된 노후 열수송관이다. 해당 배관을 통해 온수를 공급해온 한국지역난방공사와 경찰은 배관 부식을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 1990년대 수도권 신도시에 깔린 노후 열수송관이 한계에 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열수송관 파손으로 온수 공급이 중단되거나 뜨거운 물이 유출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 전국 열수송관의 32%가 노후…분당은 77%

사고가 난 열수송관의 내구연한은 40년이지만 배관 관리와 주변 지반 상태에 따라 내구연한 이전에도 심각한 부식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일산신도시의 경우 흙을 쌓아 지반을 만들었기 때문에 모래 지반에 비해 방수가 취약할 수 있다. 지역난방공사 관계자는 “흙이 물을 머금고 있어 부식이 더욱 촉진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정 의원실이 지역난방공사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역난방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열수송관 2164km 가운데 20년이 넘은 노후관은 686km로 전체의 약 32%다. 이들 노후관의 상당수가 일산, 분당 등 1기 신도시와 서울 강남 등지에 깔려 있다. 노후관의 비율은 분당(77%), 강남(54%), 반포·여의도(53%), 고양(50%) 지역이 특히 높다. 평촌과 중동, 산본 등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다른 신도시도 노후관 비율이 높아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후관 파열 사고 역시 이 지역에 집중됐다. 2013년 이후 발생한 11건 가운데 절반이 넘는 6건이 분당에서 일어났다. 강남과 고양에서도 2건씩 발생했다. 2013년 4월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서 21년 된 수송관이 부식으로 파열돼 3158가구 아파트에 24시간 동안 열 공급이 중단됐다. 2016년 3월에는 서울 송파구에서 20년 된 수송관이 파열돼 5540가구에 열 공급이 12시간가량 끊겼다.

○ 부실 보온자재가 부식 촉진

지역난방공사가 방수 성능이 떨어지는 보온자재를 쓰는 등 열수송관 관리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관을 둘러싼 보온자재는 물의 온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온수의 유출을 차단해 배관의 부식을 막는 기능을 한다. 조원철 연세대 방재안전관리센터장은 “찬물보다 뜨거운 물이 지날 때 배관이 더 쉽게 부식될 수 있어 보온자재 등을 통한 관리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역난방공사 관계자는 “2000년 이전 만들어진 보온재는 성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파손 사고가 난 열수송관의 대부분은 2000년 이전에 시공된 배관이다. 감사원은 올 9월 열수송관의 위험 등급을 관리하지 않아 유지 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지역난방공사에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역난방공사 측은 “지난달 열화상 카메라로 사고 배관 주변 지표면 온도의 이상 여부 등을 확인했지만 위험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5일 “1주일 내에 20년 이상 사용한 열수송관을 긴급 점검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한 달간 정밀진단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 “뜨거운 물기둥 2m 넘게 치솟아”


사고가 난 4일 저녁 백석역 앞 왕복 4차선 도로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100도에 가까운 뜨거운 물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상당수 시민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물이 몸에 닿아 화상을 입었다.

사고 현장 인근에 차량을 주차했던 김모 씨(49)는 “당시 물기둥이 10초 이상 2m가 넘는 높이로 계속 뿜어져 나왔다”면서 “거리에 수증기가 가득 차 1m 앞도 안 보였다”고 말했다. 인근 아파트 주민 윤모 씨(55)는 “사고 현장에서 50m가량 떨어져 있었는데도 뜨거운 물이 흘러와 발목 높이까지 도로에 찰 정도였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 주변 건물로 배달을 가던 음식 배달원 이모 씨(52)는 연기가 자욱해 불이 난 줄 알았다고 했다. 이 씨는 “‘불난 건물에서 왜 배달을 시켰지’ 생각하면서 사거리로 걸어갔다가 뜨거운 물이 발에 닿아 2도 화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은 불이 난 줄 알고 건물에서 급하게 대피했다가 화상을 입었다. 분식집 직원 한모 씨(40)는 “사람들이 수증기가 독가스인 줄 알고 대피하다 발을 데여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날 사고로 인근 4개 아파트 단지 2861가구의 난방과 온수 공급이 중단됐다가 5일 오전 8시경 임시 복구됐다.

고양=윤다빈 empty@donga.com / 이지훈 / 세종=최혜령 기자
#온수배관#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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