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없는 4년…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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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행복원정대:워라밸을 찾아서]<1부>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
<9·끝> 건강까지 앗아간 워라밸 붕괴

“암 검사를 해보죠.”

지난해 말 병원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4년간 쌓인 직장 스트레스가 병이 된 걸까. 한 달 새 몸무게가 7kg이나 줄고 머리가 빠졌다. 의사는 “김진성(가명) 씨, 아무래도 정밀검사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암 검사를 권했다. 당시 나이 28세. 암을 떠올리기엔 일러도 너무 일렀다. 정밀검사 결과 ‘갑상샘 기능 항진증(갑상샘 호르몬 과다 분비로 부정맥, 심부전 등 신체 이상이 나타나는 증상)’ 진단을 받았다. 암은 아니었지만 회의감이 밀려왔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

2014년 공공기관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이 없었다. 특목고를 거쳐 명문대에 진학했다. 인턴 자리도 얻었으니 인생의 탄탄대로에 들어선 듯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쓰고 버려지는 ‘티슈 인턴’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추가 수당을 주는 초과근로는 1년에 150시간만 인정한다. 이 기준을 넘어가면 야근을 해도 보상이 없다.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그 시간을 채웠다. 이후 매일 같이 4, 5시간 야근을 했지만 통장에 찍히는 돈은 월 130만 원에 불과했다.

그래도 하나 얻은 건 있다. 자기소개서에 ‘한 달에 100시간씩 야근을 했다’는 한 줄을 적을 수 있게 됐다. 한 줄의 위력 때문이었을까. 인턴이 끝난 뒤 A사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당장 야근은 없었지만 여러 팀을 돌아다니며 배우는 직무교육(OJT)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팀에 갈 때마다 화려한 신고식이 이어졌다. 이기지 못하는 술과 불편한 언행이 오가는 자리였다. 두 달 동안 40개 팀을 돌았으니 그 고통스러운 회식을 40번가량 한 셈이다.

반복되는 회식으로 숙취가 감기처럼 따라다녔다.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월급은 단리로 쌓이지만 피로는 복리로 쌓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한 선배는 “이 회사 다니면서 시력이 1.0에서 0.1로 떨어지고 원형탈모가 왔다”며 “아직 어리니까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떠나라”고 조언했다.

결국 2016년 대기업 B사의 신입으로 재취업했다. 워라밸을 존중하기로 소문난 회사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갑작스럽게 여러 명이 동시에 퇴사하면서 인력이 부족했지만 회사는 그 공백을 방치했다. 결국 신입인 내게 많은 일이 몰렸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 건 그때였다. 우선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길을 가다 나를 향해 재채기를 하는 행인과 싸워 경찰이 출동한 일이 있다. 출근을 앞둔 어느 날은 눈물을 마구 쏟다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몸도 함께 망가져 갔다. 감기에 걸리면 편도염이나 인후염으로 이어지는 등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아무리 먹어도 체중이 줄었다. 분노조절장애와 우울증, 체중 급감 등은 모두 갑상샘 기능 항진증의 전형적 증상임을 뒤늦게 알았다. 의사는 당장 호르몬제를 먹기보다 잠을 충분히 자라고 권했다. 그러고 보니 B사에 입사한 이후 늘 오전 7시쯤 출근해 늦은 밤 퇴근했다. 휴일도 반납하며 일한 내 삶엔 쉼표가 없었다.

4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얻은 건 무엇인가. 우울증과 공황장애, 갑상샘 기능 항진증, 만성 편도염…. 그리고 몇 천만 원이 든 통장이다. 돈은 약간 벌었지만 건강과 행복을 잃은 채 20대 끝에 서 있다. 오랜 고민 끝에 올해 초 퇴사를 감행했다. 적금을 깨 해외로 떠나는 편도 티켓을 끊었다. 대책 없이 떠나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취직 걱정을 해야 할 테다. 새로 들어갈 직장이 유토피아일 리 없다. 그래도 나 자신을 챙기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에서 30대의 첫 페이지를 열고 싶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9회 ‘일과삶붕괴병’ 웹툰은 ‘조국과 민족’으로 이름을 알린 강태진 작가가 직장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된 회사원 김진성(가명)
 씨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지박(地縛·땅에 얽매임)’은 늦은 밤까지 회사에 묶여 사는 직장인의 일상을 의미한다.
9회 ‘일과삶붕괴병’ 웹툰은 ‘조국과 민족’으로 이름을 알린 강태진 작가가 직장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된 회사원 김진성(가명) 씨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지박(地縛·땅에 얽매임)’은 늦은 밤까지 회사에 묶여 사는 직장인의 일상을 의미한다.




▼직장인 80% 번아웃증후군 경험

피로는 몸의 경고… 정확한 진단 필요
우울증-불안장애 번질수 있어


직장인 10명 중 6명은 일과 삶의 불균형으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로 ‘건강’을 꼽았다.

비영리재단 일생활균형재단 WLB연구소가 지난해 10월 직장인 10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지난 1년간 일과 삶의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로 ‘졸림과 극심한 피로가 계속된다’는 응답이 62.1%(복수 응답)로 가장 많았다.

과로가 일상인 한국의 직장인 중에는 특별한 원인 없이 심한 피로가 지속되는 ‘만성피로증후군’이나 피로 누적으로 모든 일에 무기력함을 느끼는 ‘번아웃증후군’을 경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2016년 직장인 1129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79.4%)이 번아웃증후군을 경험했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는 수면 부족을 거쳐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 생리불순은 물론이고 유산 가능성도 있다. 야근은 고열량 식사와 술 등으로 이어져 체중이 늘고 협심증, 심근경색의 원인이 된다. 국제암연구소는 야근 자체를 발암물질 등급 중 두 번째로 높은 2A로 지정했을 정도다. 유준현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피로는 몸에서 휴식을 요구하는 경고등”이라며 “피로를 무시하지 말고 증상이 지속되면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노동잡학사전 : 산업재해 인정 기준
뇌심혈관 질환은 주52시간 근무 안해도 산재 인정


올해부터 근로시간이 주당 평균 52시간에 미달해도 업무가 과중한 탓에 뇌심혈관계 질환(뇌경색, 심근경색 등)이 발생했다면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정부가 올해부터 시행한 산재인정 고시 개정안에 따르면 발병 전 12주 동안 휴일근무 등 피로가 쌓이는 ‘과중 업무’를 2개 이상 했다면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 미만이어도 산재로 인정한다.

과중 업무는 휴일·교대근무를 포함해 ‘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 등 7가지로 규정했다. 특히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60시간을 넘었다면 과중 업무를 하지 않았어도 산재로 인정한다. 지난해까지는 과중 업무를 했더라도 발병 전 12주 동안 근로시간이 주당 평균 60시간을 넘어야 산재로 인정했지만 그 기준을 완화한 것이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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