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안되면 창업해보라고? 잡스라도 한국선 ‘창피인’ 됐을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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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일자리를/청년이라 죄송합니다]1부 ‘노오력’의 배신


“(취업이 잘 안 되면) 창업도 심각하게 고민해 봐라.” 과거 한 정치인이 취업난의 대안으로 제시한 이 발언에 청년들이 ‘욱’했다. 세상 물정도 청년의 취업·창업 현실도 모르는 기성세대의 이런 생각 없는 시각에 분노를 터뜨렸다. 청년창업인들은 “창업과 취업은 다른 개념”이라며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기성세대가 잘 알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창업을 준비하다 ‘피 본 적’ 있는 청년 ‘창피인’ 10명을 모아 ‘한국 청년창업인이 성공한 스티브 잡스가 되려면’을 주제로 서울 마포구의 한 포차에서 취중대담을 진행했다.



▽안태웅(이하 안)=이게 말이 돼? 취업 안 되면 창업이라니! 스티브 잡스가 한국서 취업에 나섰다면 아마 ‘사회성’이 떨어져 탈락하고, 창업을 꿈꿨다면 혁신의 아이콘은커녕 범법자였거나 빽빽한 규정부터 공부해야 했을걸.

▽김주환(이하 김)=그러게. 사회 지도층이 창업을 ‘열정만 있으면 되는 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걱정되네.

▽안은현=열정만 갖고는 힘들지. 푸드트럭 운영 중인데 영업 공간이 제한적이야. 처음에 뭘 모르고 목 좋아 보이는 지하철역 근처에 자리 잡고 영업을 준비하다가 10분 만에 민원이 들어와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어.

▽김=딱하네. 난 피임기구를 판매하는데 여성가족부 규제가 늘 발목을 잡아.

▽안=여가부 규제? 그런 것까지 있어?

▽김=콘돔은 청소년도 구입할 수 있는 의료기기야. 근데 ‘일자형’ 외 일부 제품은 여가부가 ‘청소년 유해품’으로 지정해 관리를 하지. 사이트에 유해품을 올리면 성인 인증 과정이 필요해져 청소년이 접근할 수 없어. 성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청소년 중 절반 이상이 피임을 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는데, 유해품 규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김현정(이하 현)=규제 투성이야 정말. 나도 미국 ‘다큐사인(DocuSign)’ 성공 사례를 참조해서 온라인계약서 플랫폼 사업을 준비했어. 근데 변호사법 이건 뭐지. 법조인이 아닌 일반인이 계약 알선 등을 못 한다는 규정에 막히네. 타협점을 찾아보려 해도 쉽지 않아.

▽김병휘=합법적 아이템을 구상한다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아. 거스름돈을 동전 대신 마일리지로 적립해 주는 아이디어로 공모전에 나갔어. 사업 자금을 모아 보려 한 건데 상금이 턱없이 적어 엄두를 못 냈지. 심사 참여 기업이 실행에 옮겨버려서 김 다 샜어.

▽우찬민=안타깝다. 나한테는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브로커가 접근해 왔어. “아이디어 좋다”며 멘토가 돼 주고 투자도 유치해 주겠다는데 자꾸 착수금 2000만 원을 준비해 오라는 거야. 유명인이 손길을 내밀어서 벅찬 마음에 가족한테 손 벌려 돈도 준비했는데, 다른 선배들이 “좀 이상하다”고 말려 포기했어. 나중에 그 사람이 사기로 구속됐는데, 정말 아찔했지.

▽최강우(이하 최)=그래도 돈 나올 데는 있다는 소리잖아. 식당 같은 일반 창업은 정말 돈 나올 데가 없어. 청년 창업을 돕는다고 해서 창업지원센터를 돌았는데 “요식업은 지원 대상이 아닙니다”란 소리만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렸지. 신용이 없어 손 벌릴 곳은 제2, 3 금융권뿐이라 가족, 지인들한테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하며 손을 벌렸어.

▽전광호(이하 전)=씁쓸하네. 돈 마련하기도 힘든데 쓸 데는 또 많지 않아? 번듯한 사무실 같은 ‘쇼잉’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아. 미국같이 창고에서 사무실을 차린다면 쳐다보지도 않잖아. 임차료도 ‘후덜덜’한데. 제안서 하나 만들 때도 외관을 항상 신경 써야 하고….

▽김=맞아. 영업 다니다 ‘새파랗다’는 말 듣고 고민하다 수염까지 길러 봤거든. 어른이 생각하는 사장처럼 중후해 보이려고. 하하.

▽박인준(이하 박)=창업 이야기 할 때 ‘글로벌’ 이야기를 하잖아. 근데 왜 ‘어떻게’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을까. 미국에 가 봤는데 적어도 스타트업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 ‘델라웨어 주에 법인을 설립할 것’과 같은 공식들이 있던데.

▽최=공감해. 창업 관련 서적은 대부분 창업 후를 말하지. 처음부터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아.

▽안=우리 공부할 때 공식 이런 거 많이 외웠잖아. 청년들한테 이런 기본적인 부분만 잘 알려줘도 다들 영리해서 잘할 텐데 말이야.

▽황원준(이하 황)=맞아. 실패에 유독 가혹한 것도 문제야. 2013년 창업 당시 보증제도로 1억 원을 빌렸어. 사업이 잘 안 됐는데 돈 돌려받겠다고 집 전세금 압류에 각종 고소장이 날아오는데 어찌나 아찔하던지…. 앞으로 기회가 찾아올 것 같지도 않고 힘들었어.

▽박=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한 사람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존중해 준다는데 우리는 ‘실패했으니 또 실패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클 수밖에.

▽황=‘창업해라, 창업해라’ 뜬구름 잡는 얘기만 말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라. 책임은 어른이 져 줄 테니’ 이런 따뜻한 메시지도 주면 좋겠어.

▽현=아, 어떻게.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져.

▽김=하하. 청년들이 창업을 빌미로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젊으니까 혁신적일 뿐인 거고. 규제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한다거나, 실패하면 낙인찍는다거나 하지 않으면 좋겠어. 토양이 튼튼해진다면 진짜 스티브 잡스도 한국에서 나올 거거든.

▽전=그러게. 우리가 어떤 민족인데! 해뜰 날 올 거야. 힘들 내고, 자 건배!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청년창업#일자리#청년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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