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세상을 향해 ‘덕밍아웃’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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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의 한 상가 6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선반에 봉제 인형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너구리, 펭귄, 강아지…. 동물 인형들의 얼굴은 아이돌 그룹 엑소의 각 멤버를 닮아 있었다.

 매장 곳곳에는 ‘인형은 판매하지 않습니다’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인형에 갈아입힐 옷을 파는 인형 옷 매장이어서다. 아이돌 팬들이 좋아하는 멤버의 생김새를 살린 인형을 직접 만들어 팔거나 소장하는 유행에 맞춰 인형 옷을 제작, 판매하는 ‘전문매장’이 도심 번화가에 떡하니 들어선 셈이다.

 매장에는 엑소 멤버들의 무대의상이나 실생활에서 실제로 입었던 옷을 그대로 본뜬 제품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반바지, 티셔츠부터 턱시도나 한복, 옷에 어울리는 모자, 머리띠, 가방 등 잡화류까지 종류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 가격은 500원부터 4만 원대까지 다양했다.

 평일 오후였지만 20대 여성 고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인형 옷만 달랑 구매하고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직접 인형을 가져와 옷을 갈아입히고, 매장에서 바로 사진을 찍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다.


● 330만원짜리 피규어도 선뜻… 홈쇼핑 ‘덕후 기획전’


 
매장에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인형 크기에 맞는 인형의 집과 욕실이 구비돼 있었다. 인형을 구매하는 팬들이 많아 인형 옷 수요가 늘다보니 오프라인 매장 외에 온라인으로 옷을 판매하는 곳도 많다. “‘엑덕(엑소+덕후)’ 4년차”라고 자신을 소개한 회사원 김모 씨(29)는 “인형을 갖고 다니며 옷도 갈아입히면서 기분 전환도 하고 좋아하는 멤버에 대한 내 ‘팬심’을 기념한다”고 말했다.

 덕후는 일본의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인터넷 신조어 ‘오덕후’를 줄인 말이다. 얼마 전까지 덕후 이미지는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우스꽝스럽다는 식으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김 씨처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이 덕후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덕밍아웃(덕후+커밍아웃)’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덕후에 대한 사회의 시선도 달라졌다. 과거의 덕후는 이해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소통 능력이 부족한 잉여인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 독특한 취향을 지닌 조금 특이하지만 멋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전문가들은 이제 한국의 덕후는 단어의 어원이었던 일본의 오타쿠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2016년 현재, 진화한 덕후들은 자신만의 취미에 더욱 몰입한다. 취향에 맞는다면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좋아하는 대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립스틱이나 매니큐어 같은 화장품, 스타벅스 컵까지도 ‘덕질(덕후+질)’의 대상이 된다. 이른바 ‘취향 소비’를 덕후들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덕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위해 댓글을 달며 기업이 내놓는 상품에 입김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예 스스로 좋아하는 대상과 관련된 상품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하고, 그와 관련된 파생산업까지 나오고 있다.

덕후, 소비를 주도하다

 
홈쇼핑업체 CJ오쇼핑은 4월부터 3주에 한 번씩 금요일 오전 2시에 덕후 전문 기획 프로그램인 ‘덕후의 밤’을 방송하고 있다. 첫 회에는 영화 ‘어벤져스’ 한정판 피규어를 판매했다. 제품 가격은 최고 330만 원.

 제작진은 “처음에는 ‘누가 이런 고가 피규어를 살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330만 원짜리 피규어 2개를 비롯해 순식간에 22개가 팔려나갔다. 이 피규어만으로 14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사전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생방송 ‘인증샷’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며 순식간에 덕후들을 TV 앞으로 모았다.

 방송 뒤에도 “재미있다” “신선하다”는 반응이 올라오며 후속 방송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2회에 100만 원이 넘는 드론, 3회에 전동차와 킥보드, 4회에 디제잉 턴테이블을 선보였다. 홈쇼핑에서 흔히 방송하지 않는 고가 제품이다. 하지만 덕후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드론은 21대가 팔려나가며 2000만 원을 훌쩍 넘는 매출을 올렸고, 킥보드는 매출 5000만 원을 올렸다. 재방송이 많은 홈쇼핑 심야 방송에서 수천만 원대 매출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CJ오쇼핑 관계자는 “각 제품의 ‘덕후’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 ‘홈쇼핑에서 이런 것도 판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방송 시간을 기다려 제품을 구매하는 ‘목적 구매’가 일어났다”며 “방송 시간과 아이템이 정해지면 별다른 홍보 없이도 관련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이 난다”고 말했다.

 치킨 프랜차이즈 BHC의 히트상품 ‘뿌링클’의 인기에는 ‘치킨 덕후’들의 모임으로 알려진 연세대 치킨동아리 ‘피닉스’의 조언이 작용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치킨을 먹고 맛은 어떤지, 장단점은 뭔지 진지하게 토론한다. 맛만 봐도 어느 브랜드의 어느 치킨인지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춘 덕분에 이들의 분석력은 업계에서 유명하다. 협찬을 받지 않고 직접 구입해 맛본 치킨에 대한 리뷰를 SNS에 별점 등을 매겨 공유한다. 파워리뷰어로 명성을 날린 뒤부터 각 업체에서는 이들에게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기업들 “덕후를 잡아라”


 이처럼 덕후들의 구매력과 영향력이 입증되면서 각 기업들도 이들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7월 문을 연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의 카카오프렌즈 강남플래그십 스토어는 덕후들의 힘으로 세 달째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처음 한 달 누적 방문객 수 45만 명을 기록했고, 최근에도 주말마다 매장 앞에는 100여 명이 줄을 선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은 개발 단계부터 철저히 덕후들의 ‘취향 저격’을 목표로 했다. 캐릭터 중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라이언의 경우 갈기가 없는 수사자로 설정해 곰인형 같은 귀여운 외모와는 다른 의외의 콤플렉스를 부여했다. 노란색 얼굴을 한 토끼 모양의 ‘무지’는 사실 토끼가 아니라 단무지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무지를 따라다니는 조그만 악어 캐릭터인 ‘콘’은 비밀에 싸인 존재라는 설정이 숨어 있다. 소비자들이 이런 뒷얘기를 통해 각 캐릭터를 더욱 친숙하게 느끼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캐릭터를 골라 팬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상상의 여지를 준 덕분에 덕후들은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일상 속에서 인형과 함께하는 모습을 올리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SNS 계정(www.instagram.com/kakao_ryan/)이 대표적이다. ‘카카오프렌즈 라이언 덕후페이지’를 표방한 이 계정의 자기소개란에는 ‘후드라이언 덕심으로 대동단결’이라고 적혀 있다. 라이언이 마치 살아서 축구장, 사무실, 카페 등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듯한 설정의 사진을 찍어 올려 현재 팔로어만 24만 명을 넘겼다.

 카카오프렌즈 관계자는 “비밀을 감췄다는 설정의 캐릭터 ‘콘’에 대해 ‘대체 얘의 비밀이 뭐냐’는 팬들의 문의가 올 정도”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 비중이 작다고 항의하거나 관련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직접 제안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정판 마케팅’에도 덕후들의 수집벽을 자극하려는 업체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최근 화장품 업계에서 유행하는 캐릭터 컬래버레이션(협업) 제품이 대표적이다. 리락쿠마, 도라에몽, 미키마우스, 라인프렌즈 등 10, 20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캐릭터를 케이스에 입힌 제품을 한정판으로 내놔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8월 리락쿠마 에디션을 내놔 캐릭터 컬래버레이션 열풍을 일으킨 미샤는 최근 리락쿠마 에디션 시즌2를 내놓기도 했다.

 스스로를 ‘코덕(코스메틱 덕후)’이라고 부르는 대학원생 정미진 씨(29)는 “꼭 필요한 제품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색깔이나 질감의 제품, 케이스가 마음에 드는 제품은 꼭 사는 편”이라며 “온라인 뷰티 관련 커뮤니티에 보면 품절된 제품을 찾아 매장 곳곳을 돌아다녔다거나,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제품을 해외 직구로 구매해 발라봤다는 ‘코덕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는 머그컵이나 텀블러 등 연간 500여 종의 자체 기획 상품을 내놓고 있다. 이 제품의 상당수는 매진되면 더이상 판매하지 않는 한정판이다. 일부 제품은 처음 매장에 진열되는 날에 맞춰 덕후들이 줄을 서기도 한다. 스타벅스 관계자는 “특정 제품을 싹쓸이해 가거나 중고 제품이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등 과열 양상이 있어 최근에는 1인당 1, 2개로 구매 개수를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한정판 매출은 전체 매출의 약 10%를 차지한다.

 덕후는 기업에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추고 있고, 자신의 ‘덕질’에 대한 자부심이 큰 만큼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접근하면 거부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제품이나 기업의 마케팅에 문제가 있을 때도 가장 먼저 돌아서는 소비자가 이들이다.

 올해 초 화장품 브랜드 ‘맥’은 개그맨 유상무를 주인공으로 한 SNS 동영상 광고를 게재했다 곤욕을 치렀다. 여성 비하 발언을 해 사과까지 한 전력이 있는 개그맨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화장품 광고에 등장시켰다는 ‘코덕’들의 반발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일부 소비자들은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업체는 해당 광고를 내려야 했다.

 마케팅 전문가이자 스스로를 오타쿠로 자부하는 김선태 대홍기획 팀장은 “현재의 덕후 마케팅은 아직까지 소수의 덕후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해 낙수 효과를 누리는 니치 마케팅과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라며 “진짜 ‘덕후 마케팅’은 전문가적 지식을 갖춘 덕후를 상품 개발, 마케팅 단계부터 활용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오타쿠에 관한 인식 연구’ 등 오타쿠 문화 관련 논문을 발표해온 조홍미 경성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는 “한국의 ‘오덕후’는 호칭부터 일본의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유머러스하게 발음하며 생겨난 단어로 풍자성과 집단성을 내포하고 있다”며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생활을 존중하며, 이들을 전문가로 대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기면서 앞으로도 한국의 덕후는 더욱더 세상으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덕후#오덕#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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