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탈퇴 “Leave” 잔류 “Remain” 런던 아파트 ‘현수막 전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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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브렉시트 투표 D-1/전승훈 특파원 현지 르포]
이웃간 반대구호 내걸며 신경전… 잔류여론이 탈퇴 근소하게 앞서
청년층 “탈퇴 땐 경제혼란-고용타격” 노령층 “독립해야 옛 영광 재현”

21일 영국 런던 의회광장에 마련된 조 콕스 의원 임시 추모소에는 수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단체로 추모소를 찾은 학생들이
 ‘우리는 콕스 의원의 사랑의 메시지를 이어갈 겁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게시판에 추모 글을 남기고 있다. 런던=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21일 영국 런던 의회광장에 마련된 조 콕스 의원 임시 추모소에는 수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단체로 추모소를 찾은 학생들이 ‘우리는 콕스 의원의 사랑의 메시지를 이어갈 겁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게시판에 추모 글을 남기고 있다. 런던=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전승훈 특파원
전승훈 특파원
21일 오전(현지 시간) 의회 민주주의 발상지로 자부하는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국회의사당) 인근 의회광장. 16일 극우주의자의 손에 피살된 조 콕스 하원의원(42·노동당)의 미소 띤 사진 한 장이 꽃다발에 둘러싸인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를 놓고 영국이 찬성과 반대로 양분됐지만 이곳을 찾은 시민들은 정치적 주장을 잠시 접은 채 기도하고 촛불을 켰다. 초등학생들을 인솔해 온 교사 루크 씨는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하루 전 이곳 의사당에선 여야 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콕스 의원을 추모하는 특별회기를 열었다. 하원 의원석은 가득 찼으나 주인을 잃은 한 자리만 비었다. 보수당 소속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그녀를 살해한 증오에 맞서 오늘 그리고 영원히 단합하자”고 강조했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도 “증오와 분열을 자극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영국 시민들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23일 실시되는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영국 사회에 ‘증오의 먹구름’을 몰고 온 것이다. 이날 런던 시내를 둘러보니 아파트 발코니의 유리창에 ‘탈퇴(Leave)’ 또는 ‘잔류(Remain)’ 구호가 걸려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외신들은 이를 ‘발코니 전쟁’으로 표현했다. 한 주민은 ‘떠나는 데 한 표를(Vote Leave)’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고, 바로 옆집 주인은 ‘만일 당신이 노동자의 권리를 깎아내리고 싶다면(…if you want to cut workers‘ rights)’이라는 현수막으로 잔류 지지 의사를 밝혔다.
 

▼ 50代 “EU는 규제 많아” 20代 “탈퇴 땐 자유이동 제약” ▼

브렉시트 찬성과 반대 진영은 이날 부동층을 잡기 위해 시내 곳곳에서 홍보물을 나눠 주며 총력전을 펼쳤다. 공무원인 앤드루 길츠 씨(50)는 기자를 붙잡고 “EU는 규제가 너무 많다”며 “영국 경제를 좀먹는 이민 문제도 EU 탈퇴를 원하는 이유”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러나 정보기술(IT) 업종에 종사하는 숀 씨(22)는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EU 잔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영국이 EU에서 탈퇴한다면 자유롭게 다른 나라를 오가는 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세대도 갈라놓았다. 소득, 학력 수준, 지지 정당보다 브렉시트 의견이 명확하게 갈라지는 건 바로 청장년층과 중년층이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지난달 18일 조사한 결과 18∼24세, 25∼34세 청년층은 각각 86%, 78%가 ‘EU 잔류’를 지지한 반면 55∼64세, 65세 이상은 각각 51%, 72%가 ‘탈퇴’에 찬성했다.

노령층이 탈퇴를 지지하는 이유는 이민자 증가 때문에 은퇴 후 연금 수령에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청장년층은 영국의 실업률(5%대)과 성장률(2%대)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선방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만약 EU 탈퇴로 경제 혼란이 가중되면 그나마 확보해 놓은 경제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걱정이 적지 않다.

양분된 여론에 신이 난 건 베팅업체다. 가디언은 20일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영국 정치 이벤트 사상 최다 판돈을 끌어모은 종목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영국 최대의 베팅업체 베트페어에 따르면 지금까지 베팅 금액만 무려 4050만 파운드(약 690억 원)에 이른다.

막판 표심은 잔류 쪽에 무게추가 좀 더 실리는 분위기다. EU 탈퇴 이후 경제 상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데다 잔류를 외치다 숨진 콕스 의원에 대한 동정 여론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여론조사기관 ORB가 20일 발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적극 투표층의 경우 잔류가 53%로, 탈퇴(46%)에 7%포인트 앞섰다. 13일 같은 조사에서는 탈퇴가 49%로 잔류보다 1%포인트 앞섰었다. 사회연구조사기관 냇센이 20일 발표한 온라인과 전화 여론조사 결과도 잔류가 53%로, 47%에 그친 탈퇴보다 6%포인트 높았다. 베트페어는 국민투표 결과가 EU 잔류로 나올 가능성을 75%까지 끌어올렸다.

이 같은 잔류 여론 상승에 힘입어 영국 파운드화는 런던 외환시장에서 사흘째 오름세다. 특히 20일 하루 사이 파운드화 가치가 2.4%나 급등했다. 이는 2008년 12월 이후 하루 상승폭으로는 최고 수준이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축구 영웅’ 데이비드 베컴과 ‘해리 포터’ 시리즈 작가 조앤 K 롤링이 브렉시트 반대 입장을 밝혀 잔류파에 힘을 실어 줬다. 베컴은 2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우리는 활기차고 접속된 세상에 살고 있다. 여기선 함께하면 강해진다”며 잔류 투표를 촉구했다.

하지만 21일 발표한 FT 여론조사에서는 EU 잔류와 탈퇴 응답이 44% 동률로 나왔고 또 다른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타임스 의뢰로 조사한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는 여전히 EU 탈퇴(44%)가 잔류(42%)를 앞서 섣부른 예측은 어려운 상황이다. 국립사회연구소의 수석연구원 존 커티스 씨는 FT에 “여론조사 결과들이 초박빙이라 한쪽이 우세를 보여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콕스 의원을 추모하는 기금이 100만 파운드(약 17억 원·20일 오후 8시 반경)를 넘어섰다. 3만5000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브렉시트 이후 다시 하나 된 영국을 만들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그 속에 숨어 있는 듯했다.
 
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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