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의 흙수저로 살지만… 희망의 슈퍼파월 꿈꾼다 전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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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신조어]

신조어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사, 현실을 반영한다. 올해도 다양한 의미를 담은 신조어가 여럿 등장했다. 특히 경기 침체와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 단어가 많았다. 본보는 올해 등장한 신조어를 통해 2015년 한 해를 되돌아봤다.

○ “인문계 90%는 백수, 문과라서 죄송해”

“대기업 인턴 두 번에 홍보대사는 세 번 해봤어요. 국내외 봉사활동도 여섯 번 다녔고….”

취업준비생 이정연(가명·27·여) 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이 씨가 본격적인 취업 전쟁에 뛰어든 지도 올해로 3년째. 원서를 넣은 회사만 150곳이 넘는다. 그중 서류전형을 통과해 면접을 본 곳은 10곳 남짓. 이 씨는 “이 정도면 나름대로 평균은 되는 셈”이라며 웃었다.

이 씨는 요즘 말로 지여인이라고 불린다. 구직자들은 취업문을 뚫기 어려운 3대 요소로 ‘지방대 출신, 여자, 인문대생’을 꼽는데 이 3가지 악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 바로 지여인이다. 지여인은 ‘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문송이나 ‘인문계 90%가 논다’는 인구론을 압도한다.

특히 최근에는 토익 950점과 평점 4.0을 넘는 학점에도 기업의 러브콜을 받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어려운 게 현실이다. 토익과 학점, 딱 2가지 스펙만으로 취업할 수 있었던 선배들을 사라진 원시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빗대 오스트랄로스펙쿠스라고 부를 정도다.

그 대신 이 씨 같은 청년 구직자에겐 호모인턴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턴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어지간한 기업 간부의 업무 경험 뺨칠 정도라며 부장인턴이란 말도 생겼다. 이 때문에 요즘 구직자들은 서류전형 통과를 오르가슴에 빗대 서류가즘이라고 부를 정도다. 이 씨도 “최근 한 중견 건설사 공개채용에서 서류전형을 통과했는데 그때의 서류가즘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 조롱하고 싶은 대상은 벌레(蟲)로

도서관에는 이 씨보다 더 오랜 기간 취업 준비에 묻혀 지내는 ‘화석선배’가 적지 않다. 한창 일을 해야 할 시기에 아직 일할 곳을 찾지 못한 청춘들은 자신을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 삶의 가치를 포기해 버린 ‘N포세대’라고 말한다. 자존감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낮아진 자존감은 때때로 나와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조롱하는 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올해 유독 많이 눈에 띄는 ‘충(蟲)’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한국 남성은 벌레’라는 의미의 한남충,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엄마’를 일컫는 맘충, ‘무엇이든 설명하려 드는 사람’을 말하는 설명충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남녀 간 대립도 깊어졌다. 올 초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아몰랑’이라는 표현이 화제가 됐다. 한 여성 누리꾼이 자신의 얘기를 한참 털어놓다가 복잡한 사안 앞에서 “아몰랑”이라고 쓴 게 발단이었다. 남성들은 “있는 척은 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내용도 잘 모르면서 위기 상황을 모면하려는 행동”이라며 여성들을 비판할 때 이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이에 대적해 한남충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남성이 저지른 각종 성범죄 기사에는 “역시 한남충” “한남충답다”란 댓글을 달며 조롱하는 식이다.

○ 헬조선, 흙수저… 사회 불만 반영


“어렵게 입사했지만 동료들을 볼 마음이 더는 들지 않더군요.”

박응철(가명·33) 씨는 최근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그가 5년 전 처음 몸담았던 곳은 한 무역회사의 재무팀. 고생 끝에 들어간 회사지만 책상을 맞대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그는 신분이 달랐다.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었던 것. “멀쩡한 대학을 나왔는데 왜 계약직이냐”는 주위의 비아냥거림에도 박 씨는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빨대족 신세를 벗어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박 씨는 “일은 별로 하지 않으면서 월급날만 기다리는 월급루팡들이 넘쳐난다”고 혀를 찼다.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박 씨는 3년째 되던 해 경력을 인정받아 대기업으로 옮겼다.

기쁨은 잠시. 수년째 계속되는 경기 침체를 이기지 못하고 회사는 감원을 결정했다. 박 씨는 “아직 주니어 사원인 만큼 나한테까지 칼바람이 들이닥치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끝내 버려졌다”고 했다. 더 큰 절망감은 그 후에 찾아왔다. “회사 임원 자제들은 거의 다 살아남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들처럼 금수저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탓이겠지요.” 박 씨는 “‘노력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기성세대의 말은 나처럼 흙수저를 물고 나온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과거에도 ‘잉여’나 ‘엽기’처럼 경쟁에서 낙오된 현실을 반영하는 신조어는 많았다. 문제는 박 씨처럼 현실이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이 과거에 비해 더 늘어났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발생한 한 식품회사 명예회장의 운전사 폭행 건처럼 갑을(甲乙)관계가 드러나는 사안이 불거질수록 젊은이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는 편이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작가 장강명 씨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기성세대와 한국사회에 대한 좌절감의 수위가 적신호에 이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잉여’가 사회시스템은 정상이지만 자신은 거기에 끼지 못하는 비정상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신조어라면, ‘헬조선’에는 자신은 정상이지만 사회시스템이 잘못됐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게 장 씨의 생각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한쪽에서는 현실에 적응하며 똑똑하게 소비하는 계층도 등장했다. 60, 70대임에도 스스로 노인으로 불리기를 거부하며 자신을 가꾸는 데 집중하는 노노족이나 자신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 포미족이 대표적이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기보다 혼자 사는 이들이 늘면서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아끼는 펫팸족도 올해 새롭게 등장했다. 일부는 ‘묻지 마 구매’ 대신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네오비트족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 “사회시스템 불신 걷어내야”


하지만 올해 등장한 신조어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내용이 많은 편이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경기 침체가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설 교수는 “신조어는 젊은 계층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들은 어릴 때부터 경제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자조적인 의미를 담은 신조어도 많이 생겼다”며 “긍정적인 신조어가 늘어나려면 경기나 취업 상황 등이 개선돼야 한다”고 내다봤다.

2016년에는 긍정적인 의미의 신조어가 많이 등장할까. 경기나 신뢰 회복과 더불어 긍정적인 생각이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개그맨 김영철의 유행어로 주문을 걸어보자. “내년에는 우리 모두 힘을 내요. 슈퍼 파월(super power)∼.”

박창규 kyu@donga.com·유원모 기자
#헬조선#흙수저#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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