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 ‘임명→위촉’ 단어만 바꿔 발의… 정부안 베끼기 꼼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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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국회 성적표]<1>실적쌓기 급급한 의원입법

역대 국회마다 끊이지 않는 고질병은 ‘묻지 마 법안 발의’다. 동아일보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실적 쌓기에 급급해 졸속 법안을 무더기로 발의부터 해놓는 관행은 19대 국회에서 더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의정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국회, 정당, 시민단체 등의 우수 의원 평가기준이 대부분 법안 발의 건수이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 법안 발의 건수 챙기기 위한 ‘묻지 마 입법’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25일 “가끔 본회의장에서 만난 동료 의원이 법안 서명을 부탁해 내용을 보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며 “자신의 소관 상임위원회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법안에 벌금 액수만 살짝 바꿔 서명해 달라고 하면 안 해줄 수도 없고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의원들의 ‘묻지 마’ 법안 발의는 여야를 뛰어넘은 관행으로 굳어졌다.

19대 국회 출범 후 지난달 30일까지 의원입법은 1만5172건으로 역대 최다였다. 개별 의원과 국회 상임위원장 명의로 발의된 법안을 합친 것이다. 상임위원장 발의 법안은 비슷한 유형의 의원입법을 위원장 명의로 통폐합한 수치다. 19대 국회가 아직 7개월 정도 남았는데도 벌써 18대 국회 의원입법 건수(1만2220건)를 넘어섰다. 16대 국회(1912건)와 비교하면 15년 새 8배 가까이로 늘어난 셈이다. 상임위원장 발의로 제출되는 법안을 제외한 순수 의원입법만 따지면 가결률은 더 떨어진다. 정부가 발의한 법안 1008건은 분석에서 제외했다.

반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결률은 16대 국회(27%) 이후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19대 국회 현재까지의 가결률은 11.5%였다.

미국과 비교해 봐도 의원입법 건수는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원 정수가 435명인 미 하원의원이 2009, 2010년 발의한 건수는 6570건이었고 2007, 2008년(7340건)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이옥남 정치실장은 “꼭 필요한 법안을 발의해 본회의를 통과할 때까지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겹치기’ 발의되는 의원입법과 정부입법

2014년 2월 정부는 독학사 시험 수수료 납부 근거를 마련하는 ‘독학에 의한 학위 취득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입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안 돼 새정치민주연합 김윤덕 의원이 같은 취지의 법안을 발의해 정부의 입법 계획은 무산됐다.

법제처에 따르면 19대 국회 출범 이후 2013, 2014년 정부가 입법하려 한 법안 641건 가운데 이처럼 유사한 내용의 의원입법 때문에 철회된 법안은 각각 44, 42건이었다.

이처럼 정부입법과 의원입법이 뒤엉킨 것은 두 입법의 경계가 모호한 탓이 크다. 헌법은 제40조에서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면서도 제52조를 통해서는 정부도 법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삼권분립에 따라 국회가 입법권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정부와 분점하는 시스템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기초해 정부는 국회법 제5조의 3에 따라 각 부처의 입법 계획을 취합해 매년 1월 31일까지 정부입법 계획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계획적으로 정부입법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계획 발표가 겉치레에 그치다 보니 의원이 정부입법 계획을 검토하지 못해 ‘겹치기’ 발의를 하는 경우가 빈발하는 것이다.

○ ‘낚아채기’와 ‘청부’ 입법 사이

2년간 정부의 입법 방향과 유사한 법안을 가장 많이 대표발의한 의원은 김윤덕 의원이었다. 총 9건 중 5건은 김 의원이 속한 적이 없는 상임위원회 소관인 법무부(3건), 환경부(1건), 원자력안전위원회(1건)가 입법을 추진하려던 법안이었다. 김 의원 측은 “정부입법 계획을 참고하지만 국회 입법조사처에 조사를 의뢰하는 등 발전적인 방향을 보태 입법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의제와 전략그룹 더모아’의 조현욱 이사는 “정부와 의원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일어난 ‘반칙 입법’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의원입법을 ‘우회로’로 이용하면 정부는 입법예고, 규제개혁위원회 심사, 차관회의·국무회의 의결 등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고 의원도 법안 발의 실적을 손쉽게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 “법안통과, 정부입법이 되레 더 빨라… 단순수정 법안은 정부가 처리해야” ▼

제대로 된 입법국회 만들려면


“정작 알맹이 있는 법안은 통과시키지 못한 19대 국회의 슬픈 자화상이 드러났다.”

초선인 A 의원은 19대 국회에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순수 의원입법 869건 중 17%에 이르는 148건이 단어 몇 개만 바꾼 ‘꼼수입법’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이같이 탄식했다. 게다가 지난달 말까지 발의된 의원입법 가결률은 11.5%에 그쳤다는 소식에 더욱 자괴감을 느낀다고 했다. 한마디로 ‘부실 국회’라는 이유에서다.

○ “단어나 숫자 1, 2개 바꾸는 꼼수법안”

‘꼼수입법’의 대표적인 형태는 변화하는 시대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나 숫자 몇 개를 수정하는 식이었다. 이미 본회의를 통과했던 법률안이므로 본회의 통과가 쉬울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 같은 관행은 예전 국회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의원입법에 비해 시간이 걸리는 정부입법 절차 때문에 정부가 먼저 의원들에게 발의를 요청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2013년 7월부터 시행된 민법 개정에 따라 폐지된 금치산자, 한정치산자라는 용어 대신 피성년후견인, 피한정후견인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법안만 해도 268건이 발의됐고, 이 가운데 35건이 통과됐다. ‘임명’이라는 단어 대신 ‘위촉’으로 수정해 통과시킨 법안도 있었다. 벌금 2000만 원을 3000만 원으로, 500만 원을 1000만 원으로 숫자만 바꿔 통과시킨 법안도 수두룩했다.

이 밖에도 세월호, 메르스 사건처럼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의원들이 별 차이가 없는 법안을 무더기 발의하는 행태도 되풀이됐다. 정당별 단순 수정 법안을 분석한 결과 새누리당 44건, 새정치민주연합 100건, 무소속 4건이었다.

○ “시간 단축 위해 의원입법, 설득력 떨어져”

단순한 내용을 바꿔야 하는 법안을 정부입법으로 처리하면 국회에 법안 제출하기 전까지 입법예고, 공청회, 국무회의 의결 등을 거쳐야 한다. 정부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까지 정부입법은 의원입법에 비해 4, 5개월 정도 더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법안이 국회에 넘어온 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속도는 정부입법이 3, 4개월 빠른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시간 단축을 위한 것”이라는 정부 당국의 핑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제로 민법 개정에 따라 용어를 변경하는 법안을 정부가 발의한 경우 본회의 통과까지 4개월이 걸렸지만 의원발의의 경우 8개월이 걸린 적도 있었다. 실적 채우기용 꼼수입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반론도 있다. 국회는 2013년 당시 강창희 국회의장 시절 현행 법 조항 중 형평에 맞지 않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을 선별하자는 취지에서 국회 법정형정비 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후 각 상임위원장에게 협조를 요청한 결과 상임위원장들과 여야 간사 명의로 단순 수정법안 발의가 많아지게 됐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의원과 정부는 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의원들도 보다 의미 있는 입법 활동에 주력해야 하고, 정부도 단순 수정만 하는 법안은 책임지고 처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국회 관계자는 “일부 의원이 실적 쌓기용으로 통과되기 쉬운 법안만 골라 발의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명확한 기준을 만드는 것도 검토할 만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차길호 기자 kilo@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국회#19대국회#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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