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조세피난처 거쳐온 47兆 정조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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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외국인’ 27명 조사 의미

철강 중개무역업체 A사의 대표는 2013년 무렵 홍콩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뒤 국내 회사 수익 중 71억 원을 이곳으로 보냈다. 그는 이어 외국인투자가인 것처럼 가장해 한국 주식시장에 이 돈을 고스란히 투자해 큰 수익을 냈지만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정보기술(IT) 분야 수출업체인 B사도 국내 회사의 수익 662억 원을 조세피난처 지역의 페이퍼컴퍼니에 보냈다가 외국인투자가인 것처럼 속이고 이 중 100억 원을 계열사에 투자하거나 국내 상장회사 주식을 사들이는 데 썼다.

최근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등은 위장 외국인투자가 적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위장 외국인투자가를 추려내기 위한 모형을 개발했고, 최근 27명을 적발해 조사에 들어간 것도 그 성과 중 하나다.

해외법인이 ‘유령법인’인지 조사하는 것은 현지에 가서 조사하지 않는 한 한계가 있고 시세조종, 내부거래 정보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 여부를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은 과거에 검은머리 외국인에 대한 조사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가 갈수록 늘면서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융당국이 ‘고위험 조세피난처’로 주시하고 있는 지역은 버진아일랜드, 케이맨 제도, 버뮤다를 비롯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세회피지역으로 의심한 적이 있는 55개국이다. 4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올해 7월 말 현재 이들 55개국에서 한국으로 유입된 주식투자액은 47조3000억 원이다. 전체 외국인투자가의 주식보유 잔액(430조6000억 원) 중 11.0%가 이들 고위험 조세피난처에서 들어온 것이다.

금융당국은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우고 활동하는 이들 외국인투자가 중 상당수가 한국인이 위장한 ‘검은머리 외국인’인 것으로 추정한다. 현행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한국인도 외국에 법인을 세우면 외국인투자가로서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할 수 있다. 검은머리 외국인은 한국에서 주식거래를 해도 금융당국에 주식보유 현황을 보고하지 않아도 되고, 종합소득세 등 각종 납세 의무도 지지 않는다. 외국인으로 위장하려는 한국인 투자자가 많은 이유다.

국내 증시에서 특정 종목의 시세를 조종하거나, 자신과 관련 있는 기업의 내부정보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수익을 거두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실제로 지난해 4월 금감원이 공개한 불공정 거래 사례에서는 시세조종을 하거나 내부정보를 이용한 기업인들의 행태가 대거 드러났다. C기업 대표는 조세피난처에 세워진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자사 주식에 대한 고가매수 주문을 수천 회나 내 시세를 끌어올렸다. D기업 대표는 부도 직전에 페이퍼컴퍼니가 보유했던 자사 주식을 몰래 팔아 수십억 원대의 손실을 피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탈세, 우호 지분 확대 등을 위한 편법으로 외국인투자가인 척 위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세피난처에서 유입된 투자금액의 수익률이 유독 높다는 점은 주식 불공정 거래 의혹을 뒷받침한다. 지난해 양철원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가 발표한 논문 ‘조세회피처 외국인 거래의 주가예측력’에 따르면 2005년 8월∼2009년 8월 조세회피처의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사들인 581개 종목과 투자 포트폴리오를 분석한 결과 이들은 매달 5.6%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투자자들이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 비슷한 투자 포트폴리오로 투자했다면 수익률은 1.4%에 그쳤을 것으로 추산됐다. 양 교수는 “이런 결과는 이들 투자자 중 상당수가 한국 기업의 내부자였다는 걸 암시한다”고 말했다.

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새누리당)은 “위장 외국인이 불법 증권거래로 국내 금융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금융당국과 조세당국 사이 정보공유가 긴밀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유관기관들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일 jikim@donga.com·장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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