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 둥지 튼 한전직원, 無병원 無경찰 無학원에 한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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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無 혁신도시]2015년까지 180개 기관 옮기는 도시 10곳, 기반시설 턱없이 부족

아직도 공사중 한국전력 등 16개 공공기관이 이전하는 전남 나주시 빛가람혁신도시는 곳곳에서 진행 중인 각종 공사로 큰 불편을 겪고 있다. 한전 신사옥 인근에 건축 폐자재 등이 쌓여 있고(왼쪽 사진), 도로 곳곳에 주차된 차들 사이로 공사 차량들이 무질서하게 지나다니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아직도 공사중 한국전력 등 16개 공공기관이 이전하는 전남 나주시 빛가람혁신도시는 곳곳에서 진행 중인 각종 공사로 큰 불편을 겪고 있다. 한전 신사옥 인근에 건축 폐자재 등이 쌓여 있고(왼쪽 사진), 도로 곳곳에 주차된 차들 사이로 공사 차량들이 무질서하게 지나다니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국의 공공기관 및 정부기관 180개를 지역으로 이전하는 ‘혁신도시’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 등 120개 기관이 올해 말까지 이전을 마치고, 내년 말이면 대부분의 기관이 이전 작업을 끝낼 계획이다. 혁신도시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전국 10개 지자체에 신도시를 건설해 공공기관 등을 이전하는 사업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부터 본격 추진됐다. 이전을 마친 공공기관들은 혁신도시들이 교통 치안 교육 등 기본적인 인프라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업무 추진 과정에서 각종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지적도 많다. 국회에 사업 관련 보고하거나 세종시에 내려가 있는 주무 부처와 업무를 협의할 일이 많은데 지역적으로 멀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의사소통도 어렵다는 것이다. 수도권에 주로 남아 있는 협력업체들과 회의 한 번 열기도 부담스럽다. 공공기관들은 지역균형 발전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혁신도시가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12일 오전 전남 나주시의 빛가람혁신도시. 서울 용산역에서 KTX로 3시간을 달려 나주역에 도착한 뒤 자동차로 10여 분을 이동해 영산강을 건너니 생경한 고층빌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의도의 2.5배 면적(7.3km²)인 이 혁신도시에는 호남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31층의 한전 본사 신사옥을 비롯해 한전KPS,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등 공공기관 건물들이 들어섰다. 전국 10개 혁신도시 중 이전 기관이 16개로 가장 많은 빛가람혁신도시에는 올 해 말까지 13개 기관이 이전을 마치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다.

11월 초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옛 본사에서 나주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행해온 한전은 이달 17일 열릴 이전 기념식 준비로 분주했다. 새 건물 특유의 화학약품 냄새가 곳곳에 진동하고 사무실 한쪽에는 풀지 못한 이사박스가 잔뜩 쌓여 있었다. 한전 직원 A 씨는 “나주로 이사온 지 사흘밖에 안 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급한 대로 회사 주변 오피스텔을 월세로 구했다”면서 “가족이 있는 서울에는 당분간 주말에나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9월에 이전을 마친 한국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이곳은 병원 경찰 학원이 없는 3무(無) 도시”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곳으로 이전한 기관 직원 중 가족들과 함께 이사한 직원들의 비중은 20%가 채 안 된다. 정주여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탓이 크다.

나주는 전국 10개 혁신도시 중 기반시설이 그나마 나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도 병원은커녕 약국도 없다. 소화제 등이 필요하면 10km가량 떨어진 아파트단지 상가에 가야 한다. 파출소도 없어 나주경찰서가 ‘이동파출소’ 형식으로 순찰차를 보낸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직원 대부분은 하루 세 끼를 구내식당이나 인근 ‘함바(건설현장 식당)’에서 해결한다. 빛가람혁신도시에는 1만5000채의 주택이 들어설 예정이지만 현재 입주할 수 있는 곳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지은 아파트 2255채뿐이다. 직원 상당수는 주변의 원룸이나 20km가량 떨어진 광주시에 머물고 있다.

부부가 모두 공기업에 다녀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한 전력 공기업의 김모 차장은 요즘 동정의 대상이 됐다. 남편은 전남 나주에, 금융공기업 직원인 부인은 직장이 옮겨간 부산에서 살게 됐다. 하나뿐인 중학생 아들은 고민 끝에 서울 할머니 집에 남겨 두기로 했다. 김 차장은 “서울 강남지역에서 자란 아들을 제대로 된 학원조차 없는 지방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면서 “아내의 퇴직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세 집 살림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날로 커지는 업무의 비효율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국회만 빼면 갑(甲)으로서 산하기관 임직원을 부르거나 청사 내 타 부처들과 업무 협의를 할 수 있는 세종시의 중앙 정부부처들과 달리 공공기관 직원들은 언제든지 상급기관이 부르면 서울이나 세종으로 달려가야 한다. 공공기관의 협력업체들이 자신들보다 ‘을(乙)’이라 해도 사방이 공사장인 혁신도시로 부르기는 부담스럽다. 대중교통 이용도 어렵다. 나주에서 정부세종청사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인 충북 청주시 오송역으로 가는 KTX는 하루에 한 대뿐이다.

혁신도시 특수(特需)를 기대했던 지자체들도 불만이 크다. 세종시 한 곳에만 국비 22조5000억 원이 들어간 것과 달리 혁신도시는 10곳을 합쳐 9조9500억 원의 사업비만 투입됐다. 이전 기관 임직원들이 지역 거주를 기피하다 보니 경제적 파급효과도 예상보다 미미하다는 게 지자체들의 불만이다. 나주시 관계자는 “정부가 공공기관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지방세인 취득세 재산세 등을 감면해 주다 보니 정작 지방에 들어오는 세수(稅收)는 거의 없다”며 “기관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빚을 내야 할 지경”이라고 푸념했다.

나주=이상훈 january@donga.com / 정임수 기자
#혁신도시#나주시#한국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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