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거북선-長劍은 상상력… “오류 있지만 수긍할 수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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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판도 뒤바꾼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대첩… 전문가와 함께 고증해보니

6일 기준으로 관객 700만 명을 넘은 영화 ‘명량’. 백병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치지만(장면①), 실제 명량대첩에서 백병전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왜적이 달라붙어 육탄전이 벌어진 건(장면②) 안위 장군의 배뿐이었다. 울돌목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왜선(장면③) 역시 330척이 아닌 133척으로 전해진다. CJ E&M 제공
6일 기준으로 관객 700만 명을 넘은 영화 ‘명량’. 백병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치지만(장면①), 실제 명량대첩에서 백병전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왜적이 달라붙어 육탄전이 벌어진 건(장면②) 안위 장군의 배뿐이었다. 울돌목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왜선(장면③) 역시 330척이 아닌 133척으로 전해진다. CJ E&M 제공
영화 ‘명량’이 흥행 광풍을 일으키면서 이순신 장군과 명량대첩(鳴梁大捷)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불이 붙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인터넷 댓글을 보면 영화 관람 후 난중일기나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읽고 싶단 의견이 많다.

정유재란의 판도를 뒤바꿔놓았던 명량대첩은 어떤 전투였을까. 조선 선조 30년(1597년) 음력 9월 16일 울돌목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을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과 윤인수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학예연구사의 도움을 얻어 짚어봤다. 두 학자 모두 개봉 직후 영화를 관람했다.

○ 거북선과 장검은 영화적 상상력

노 소장과 윤 학예사는 “이순신 장군을 되새기는 감동스러운 영화”라며 “역사적 오류도 있으나 수긍할 만한 수준”이라고 총평했다.

하지만 몇몇 짚을 대목이 없진 않다. 두 사람 모두 전쟁 직전 손실된 ‘거북선’을 첫손에 꼽았다. 명량에서 거북선은 건조되질 않았다. 앞서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인 칠천량해전 뒤 남은 게 없었다. 다만 충무공의 조카 이분(1566∼1619)이 쓴 행록(行錄)에 “장군이 전선을 구선(龜船)처럼 꾸며 군세를 도우라 명했다”고 나온다. 거북선을 무서워한 왜적을 기만하는 전술이었다.

장군이 친히 ‘장검’(보물 제326호)으로 적을 베던 모습도 사실과 다르다. 올해 제작 7주갑(周甲·420주년)을 맞는 장검 두 자루는 길이가 약 2m.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은 “칼날에 격검흔(擊劍痕·검이 부딪친 흔적)이 없는 의장용”이라고 설명했다. 공은 길이가 90∼100cm인 쌍룡검(雙龍劒)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백병전은 대장선에선 벌어지질 않았다. 거제현령으로 선봉에 섰던 안위(安衛·이승준 연기) 장군 배만 “왜적들이 의부(蟻附·개미떼처럼 달라붙음)해” 몸싸움이 벌어졌다.

○ 충무공의 수준 높은 심리전 돋보여

사실 명량대첩은 겉만 보면 다소 ‘밋밋하게’ 진행됐다. 1592년 한산대첩의 학익진(鶴翼陣) 같은 화려함은 없었다. 하지만 충무공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심리전에도 달통한 리더였다. 먼저 13척으로 전투에 나서 적이 가벼이 여기도록 만들었다. 함대 수는 공이 장계를 올릴 땐 12척이었으나 전쟁 직전 1척을 더 모았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방심한 왜군은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낯선 조류도 개의치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때 또 다른 심리전술을 가동하는데, 영화처럼 일자진(一字陣)을 펼친 뒤 그 후방에 고깃배 수백 척을 띄웠다. 2011년 노 소장이 발굴한 의병장 오익창(吳益昌·1557∼1635)의 ‘사호집(沙湖集)’엔 “적이 대규모 전선으로 오인하도록 위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류와 위장에 당황한 왜군은 좁은 길목 탓에 조선 수군과 엇비슷한 숫자만 앞에 섰다. 마주선 배는 거의 13 대 13인 셈. 이때 조선의 우월한 화포가 위력을 발휘했다. 무른 삼나무로 만든 왜군의 배는 포의 반동을 버틸 수 없어 대포를 실을 수 없었다. 조선 판옥선은 두껍고 단단한 소나무 재질이라 원거리 화포 장착에 걸맞았다. 이렇게 한 줄 한 줄 포격으로 때려 부수니 왜적은 수적 우위를 써먹지 못했다.

‘충파(沖破·배와 배를 부딪쳐 부숨)’도 이 같은 배의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왜선은 안 그래도 무른 목재인 데다 해협을 건너기에 유리하도록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이었다. 조선 판옥선은 평상시엔 세곡을 나르는 조운선(漕運船)으로 쓰던 평저선(平底船·바닥이 평평한 배)이었다. 단단한 데다 넓적하니 충돌에 강했다. 다만 명량 때 충파 전술을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사료는 이 해전에서 적선 31척이 침몰했다고 전한다. 영화처럼 330척이 전투에 나섰다면 겨우 10%를 잃고 퇴각하는 게 어색하다. 전남 해남군에 있는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에도 330척으로 나오나, 학계에선 운용할 수 있던 총량일 뿐 실제 전투엔 133척이 참전했다고 본다. 그래도 100척 넘게 남았는데 꽁무니를 뺀 건 역시 ‘이순신’이란 이름 석자가 지닌 힘이었다. 충무공은 적들의 이런 심리까지 내다봤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명량#이순신#명량대첩#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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