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소설]<11>미드나잇 하이웨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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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그래, 아버지 산소까지 갈 필요도 없다. 여기가, 여기가 오히려 더 적당하다. 나는 깜빡이를 넣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새벽 세 시 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신탄진 방면 ‘졸음 쉼터’엔 정차한 트럭 한 대, 가로등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성의 없이 만든 나무 모형 벤치 하나가 어둠 속에 쓸쓸하게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차창을 한 번 내렸다가 다시 끝까지 올렸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더이상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만 더 커질 뿐. 나는 조수석 위에 놓인 검정 비닐봉지에서 투명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것으로 차 문 유리창 끝부분을 촘촘하게 막았다. 한 번으로 안심되지 않아 두 번, 세 번, 겹쳐 붙였다. 그것만으로도 차 안 공기는 이전보다 더 농밀해진 느낌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화덕에 번개탄을 넣고 불을 붙이면 그뿐. 나는 뒷좌석 바닥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놓여 있는 작은 항아리만 한 화덕을 내려다보았다. 만오천 원을 주고 산 화덕. 나를 끝장낼 화덕.

죽을 생각까지는 해 본 적 없었다. 상황이 자꾸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럴수록 까닭 없는 오기 같은 것이 생기기도 했다. 하긴, 그랬으니까 사채까지 손댄 것이겠지…. 아버지는 왜 그런 부채투성이 주물 공장을 나에게 떠넘기다시피 물려주고 떠난 것일까? 원망하는 마음마저도 이젠 오래전 달아놓은 플래카드처럼 너덜너덜해진 느낌이다. 나는 번개탄과 함께 산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눈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상체를 돌려 주섬주섬 번개탄을 화덕 위에 올려놓았을 때, 별안간 주위가 환해졌다. ‘졸음쉼터’ 안으로 트럭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운전석 깊숙이 상체를 숙이고 돌아앉았다.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너무 밝았다. 어차피 잠깐 눈이나 붙이고 갈 사람이려니. 나는 조용히 헤드라이트가 꺼지길 기다렸다.

헤드라이트가 꺼지고 얼마 후, 누군가 똑똑 차 문 유리창을 두드렸다. 주머니가 지나치게 많이 달린 붉은색 등산 조끼를 입은 남자였다. 나는 차창을 내리려다가 투명테이프 생각이 나, 그대로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 혹시 라이터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이게 트럭이라고 원, 라이터 잭도 나가고 엉망이어서….”

남자는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가는 사람이었다.

“쓰고 그냥 가지세요.”

나는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그에게 건네준 후, 차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고마워서 어쩌죠,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 그냥 두 눈을 감아버렸다. 무언가 삐끗, 리듬이 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한 달 전 서류까지 깨끗하게 정리하고 떠난 아내를 생각하고 있을 때쯤… 또 한 번 똑똑, 남자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아,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최대한 화를 참으며 다시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 이건 제가 선생님께 고마워서 그러는 건데요, 이게 진짜 유명한 간잽이가 손을 본 고등어거든요. 제가 이걸 마트에 사만팔천 원에 납품하는 건데, 선생님한텐 그냥 삼만 원만 받고 넘길게요. 이게 염장이 아주 제대로 된 거라서.”

아이 씨, 정말…. 생각 같아선 그냥 삼만 원을 주고 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지갑엔 만육천 원이 전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죽은 후, 화덕 옆에 간고등어가 놓여 있는 게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과연 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이번엔 아무 말하지 않고, 그를 잠깐 노려보기만 한 후, 운전석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몇 분 지나지 않아, 똑똑, 그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뭡니까! 왜요! 왜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네?”

나는 바락바락 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씨익,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저기 그러지 마시고요, 선생님. 여기 벤치에 앉아서 저하고 같이 고등어나 한 마리 구워 드시죠. 어차피 라이터도 저 주셔서 번개탄 붙이기도 어려우실 텐데… 뭐, 그냥 허기나 채우자고요. 별도 좋은데.”

나는 그의 손에 쥐인 라이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뚝뚝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기호 소설가
#아버지#산소#번개탄#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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