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설악산 재난안전팀 ‘러셀’대원들의 세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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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팍 쌓인 눈, 몸으로 다져가며… 길 내기 2시간에 200m

폭설이 엿새째 이어진 12일 오후 설악산국립공원 재난안전관리반 대원들이 비선대로 향하며 가슴팍까지 차오른 눈길을 헤치고 있다. 눈에 묻혀 사라진 겨울 산길을 등산객들이 안전하게 오르도록 먼저 발자국을 내는 게 이들의 임무다. 눈사태를 만나거나 길을 잘못 들어 고립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설악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폭설이 엿새째 이어진 12일 오후 설악산국립공원 재난안전관리반 대원들이 비선대로 향하며 가슴팍까지 차오른 눈길을 헤치고 있다. 눈에 묻혀 사라진 겨울 산길을 등산객들이 안전하게 오르도록 먼저 발자국을 내는 게 이들의 임무다. 눈사태를 만나거나 길을 잘못 들어 고립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설악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설악산 설원은 케이크의 하얀 생크림처럼 매끈했다. 12일 정오, 눈 위로 햇살이 반사돼 눈부시게 빛났다. 길과 길 아닌 곳의 경계는 사라지고 없었다. 발을 내디뎠다. 눈은 포근하게 등산화를 감싸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가슴까지 소리 없이 빨아들였다. 7일부터 계속된 폭설로 이날 설악산의 적설량은 저지대가 1.5m, 고지대는 2m까지 쌓였다. 전례 없는 ‘눈 폭탄’이었다.

설악산 비선대로 가는 길. 기자와 등반길에 동행한 사내들의 입에서 ‘아이쿠’ ‘아이 씨’ 하는 소리가 났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 사무소 재난안전관리반 대원들이었다. 폭설로 사라진 산길을 복원하는 작업을 대원들은 ‘러셀(Russel)’이라고 불렀다. 제설차를 발명한 미국인의 이름을 딴 것. 눈 덮인 산길을 미리 뚫어놓지 않으면 등반객들이 길을 잘못 들어 조난되거나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다. 설악산 탐방로는 기상청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면 폐쇄되고 대원들이 길을 뚫어야 다시 열린다. 이날 재난안전관리반 대원 7명이 폭설 후 처음으로 나선 러셀 작업에 기자가 따라나섰다.
하얀 암흑

선두에 선 대원이 삽을 들어올려 가슴팍까지 차오른 눈을 헤쳤다. 그러자 사방에서 눈이 모래처럼 흘러내려 빈 공간을 채웠다. 새로 내린 눈은 습기가 없어 사르르 부서졌다. 삽으로 눈을 걷어치우면서 상체를 앞으로 굽혀 눈을 짓눌러야 했다. 그러곤 다시 무릎으로 눈을 다지며 다른 쪽 발을 허리 높이까지 들어올려 한발자국 나아갔다. 앞사람이 그렇게 내놓은 흔적을 일렬로 선 뒷사람들이 따라 걸으며 길을 만들었다. 7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온전히 몸으로 길을 트는 이 과정을 거치자 50cm 정도의 길이 생겼다.

“야, 얼마나 갔다고 옆으로 자빠지냐!”

30m쯤 나아갔을 즈음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맨 앞에 가던 대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드러누운 것이다. 눈으로 막힌 길을 처음으로 열어야 하는 선두는 체력 소모가 가장 크다.

먼저 첫발을 내딛다 보니 눈 웅덩이도 자주 만난다. 바위틈을 잘못 디디면 자기 키를 훌쩍 넘겨 눈에 잠길 때도 있다. 한순간 ‘하얀 암흑’에 압도당하고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진다. 일반 등산객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살아나오기가 쉽지 않다.

위험하고 힘든 선두는 대원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두 번째 대원이 선두가 되고, 맨 앞에 가던 대원은 맨 뒤로 가는 식이다. 7명이 몇 사이클을 돌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온 길을 되돌아보니 200m가 채 되지 않았다. 이날 목표량 500m를 채우려면 3∼4시간을 더 해야 했다. 설악산 탐방로의 총 길이는 90km. 겨울마다 설악산 관리사무소에 소속된 대원 20여 명이 하루 4∼8시간씩 몇 주간 러셀 작업을 한다.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대원들의 신경이 더욱 예민해졌다. 경사진 곳에서 눈을 뚫다 보면 아래쪽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눈사태가 덮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온 뒤 햇볕이 들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고, 그 위에 새 눈이 쌓이면 미끄러운 얼음 위에 거대한 눈덩이가 얹어진 모양새가 된다. 가벼운 충격에도 순식간에 밀려 내려올 수 있다. 가슴까지 눈에 파묻힌 채 러셀 작업을 하는 도중엔 눈사태가 오는 걸 뻔히 보고도 피할 수 없다. 강한 눈사태에 휩쓸리면 순식간에 200∼300m를 떠내려간다.

러셀 도중 기자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대원들이 ‘쉿’ 하며 눈치를 줬다. 임준호 대원(구조경력 12년 차)은 “오르막에서는 최대한 정숙해야 한다. 목소리도 파동이 있어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입산이 전면 통제된 설산의 한복판에선 작은 말소리도 명료하고 크게 들렸다.


홀로 살아남은 자의 눈빛


폭설이 내린 직후엔 눈사태나 크고 날선 고드름이 떨어지는 낙빙 위험 때문에 러셀 작업을 가급적 자제한다. 하지만 설산에 고립된 등반객의 조난 신고가 들어오면 위험을 무릅쓰고 눈길을 헤쳐야 한다.

손경완 대원(구조경력 15년 차)이 2012년 2월 공룡능선에서 조난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의 일이다. 목적지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눈 속에 파묻힌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인근 탐방로가 진작 폐쇄돼 사람이 들어와 있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거기 누구예요!”

50대로 보이는 남성은 눈이 풀린 채 손 대원을 쳐다볼 뿐 답이 없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정신 차려요!”

이 조난객은 함께 눈길을 헤매던 친구 2명을 조금 전 눈사태로 쓸려 보내고 혼자 남겨진 상태였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데다 저체온증으로 의식이 혼미해져 구조요청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함께 출동한 구조대원 절반은 원래 목적지로 가고 나머지는 그곳에 남아 사라진 2명을 수색했다. 하지만 곧 해가 저물고 바람까지 세게 불어 구조대원들마저 오도 가도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비박을 해야 했다.

“처음 들어온 신고만 생각해 비박 준비를 안 하고 올라간 터라 텐트도 없이 맨몸으로 버텼죠. 잠들면 얼어 죽기 때문에 서로 따귀를 때려가며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비박은 요즘 낭만적 산행 방식 중 하나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 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지난해 겨울 비박 산행을 온 등산객이 바위 밑에서 추위를 달래려 불을 피웠다가 눈이 녹으면서 바위가 움직여 압사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대원들은 다음 날 아침 수색을 재개해 300m쯤 휩쓸려 내려간 시신을 발견해 업고 내려왔다. 나머지 시신 한 구는 석 달 뒤인 5월, 눈이 다 녹은 뒤에야 발견됐다. 처음 눈사태를 맞은 곳에서 무려 1km 가까이 떨어진 곳이었다.
고급 등산장비의 덫

폭설은 야생동물에게도 큰 재난이다. 12일 설악산 기슭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눈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얼굴만 빠끔히 내놓고 있다. 고라니 노루 산양 같은 동물들은 다리가 가늘어 눈에서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진다. 러셀 대원들은 눈에 고립된 야생동물도 구조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폭설은 야생동물에게도 큰 재난이다. 12일 설악산 기슭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눈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얼굴만 빠끔히 내놓고 있다. 고라니 노루 산양 같은 동물들은 다리가 가늘어 눈에서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진다. 러셀 대원들은 눈에 고립된 야생동물도 구조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조난객들 가운데는 고가의 등산장비만 믿고 섣불리 산행에 나선 경우가 많다. 고어텍스 등산화나 두꺼운 다운점퍼만 있으면 혹한에 끄떡없다고 주장하는 등산용품 업체들의 광고에 현혹된 탓이다. 하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고급 장비라도 오히려 독이 된다.

겨울 산에 오를 때 처음부터 두껍게 입는 건 금물이다. 경사를 오르다 보면 금세 땀이 맺히고 바깥의 추운 공기와 만나 얼어붙는다. 이 상태로 등산하는 건 대형 냉장고를 몸에 이고 가는 꼴이다. 초반부터 땀을 내며 체력을 소진시킨 데다 체온까지 떨어져 저체온증이 쉽게 올 수 있다. 저체온증이 오면 판단력이 흐려져 위급 상황에 대비한 장비를 챙겨오고도 필요할 때 활용하지 못한다.

손형일 대원(구조경력 10년 차)은 “탈진해 떨고 있는 조난객의 가방을 열어 보면 따뜻한 옷이나 비상식량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 번 떨어진 체온은 다시 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애초에 체온 관리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처음엔 가벼운 바람막이만 걸치고 올라가다 휴식을 취할 때 체온 유지용으로 두꺼운 점퍼를 입는 게 정석이다.

과시 목적으로 산에 오르다 위험을 자초하는 등산객도 많다. 일부 산악회 회원들은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 사진을 찍은 뒤 동호회 카페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자랑삼아 올린다. 얼마 전 얼어붙은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 추락해 중상을 입은 사례가 있었다. 손경완 대원은 “남들이 못 가는 데를 가고, 누가 빨리 정상에 오르느냐로 경쟁하는 잘못된 등산 문화 때문에 목숨을 위협하는 무모한 산행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단체로 불법 산행을 하다 조난된 일행 중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좋은 경치 보겠다”며 무작정 따라온 사람들이 상당수다.

불법 산행 중인 사람이라도 조난당하면 구조해 하산시키는 게 급선무지만 상황이 끝난 뒤에는 규정에 따라 과태료 10만 원을 부과한다. 목숨 걸고 구조해놓고 딱지를 끊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이때 “못 낸다”고 버티거나, 대원들에게 “에라, 봉이 김선달보다 더 한 놈아” “평생 그러고 살아”라며 경멸하듯 쏘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못 걷겠다는 거구 남성 업고 하산했더니…


무엇보다 대원들이 씁쓸해 하는 건 위급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간사한 단면이다. 손경완 대원은 출입통제구역에서 허리 부상을 입고 쓰러진 조난객을 구하러 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기가 찼다고 했다. 아무리 “도와 달라”고 소리쳐도 등산객들이 “힘내라”는 말만 하고 다들 내빼더라는 것이다. 매서운 눈바람을 견디다 못해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한 등반객은 “나도 불법 산행 중이라 신고하면 과태료를 내야 해서…”라며 지나쳐갔다. 다행히 누군가 구조신고를 하긴 했지만 접수요원이 자세한 위치를 물으려 하자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걸려온 번호로 다시 걸어 보니 발신자 추적이 안 되는 공중전화였다.

산에서 편하게 내려오려고 환자 행세를 하는 ‘나이롱 조난객’들도 많다. 중상자는 헬기로 이송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대원들이 등에 업고 하산하는데 이를 악용하는 것이다. 손형일 대원은 “양 발목이 다 삐었다”며 주저앉은 체중 90kg의 남성을 2시간 동안 혼자 업고 내려왔다. 거구의 남성은 “조금도 못 걷겠다”고 하소연했다. 손 대원이 주차장까지 업고 가 “여기 맞죠” 하며 내려주는 순간 그 남성은 “아이고, 고생하셨네”란 인사만 남기고 관광버스로 뛰어 올라갔다. 러셀 작업은 허리와 무릎에 하중이 많이 가 대원 대부분은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 손 대원 역시 무릎 연골이 거의 닳아버린 상태다. 손 대원은 “내 무릎이 나가는 것도 억울하지만 그런 분들 때문에 정말 위급한 신고가 들어와도 빨리 출동을 못하는 게 더 안타깝다”고 한탄했다. 부상 신고가 들어와 “병원 응급실까지 모셔드리겠다”고 안내하면 “그럼 올 필요 없다”며 물러나는 신고자도 상당수라고 한다.

조난 신고를 해 대원들을 올라오게 한 뒤 물이나 비상식량만 받고 “알아서 가겠다”고 하는 등산객도 있다. 유규하 대원(구조경력 9년 차)은 “무거운 응급장비까지 다 메고 올라갔는데 ‘물셔틀’ ‘밥셔틀’을 당하고 나면 다시 내려오기 힘들 만큼 기운이 빠진다”고 말했다.
사망자 발견 순간 날아든 비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을 대원들은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한겨울 드넓은 설산에서 ‘김서방’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난자를 찾아 헤매다 미세한 발자국을 봤을 때, 치명상을 입은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상태가 좋을 때, 구급차에 태워 보낸 중상자가 의식을 회복해 감사 연락을 해 왔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생각을 해봐요. 내가 사람을 살렸는데…. 평생 한 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대원들은 조난 현장에서 감동적인 순간과 종종 맞닥뜨린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흘러든 두 등반객이 서로 처음 보는 사이에도 손을 잡고 제자리 뛰기를 하며 구조대를 기다렸던 사례도 있었다. 손형일 대원은 몇 년 전 이틀간의 수색 끝에 사망자를 발견한 순간 무전을 통해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운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손 대원은 “그날 이후 사망한 조난객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모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민간구조대 경력까지 포함하면 20년 가까이 설악산을 터전으로 살아온 대원들에게 “산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뭔가 그럴 듯한 대답을 기대했는데 대원들의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느끼는 게 매번 다르니까.”
“산…. 좋고 또 무섭죠. 감히 뭐라고 얘길 못하겠어요.”
“뒷산 가듯 설악산에 오는 분들도 있지만 저에겐 한없이 거대한 존재죠.”
러셀 작업을 마치고 대원들과 숙소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무전이 울렸다.
‘조난자 발생. 희운각 대피소 1km 하단에 3명.’
방금 전까지 무릎과 허리를 주무르며 “내 연골 다 어디 갔어?” 하고 타령하던 대원들이 말없이 젖은 등산복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

설악산=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설악산#재난안전팀#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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