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육아-요리-청소를 하니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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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여성시대]15부 스웨덴편<下>성평등 교육

스웨덴 성평등은 교육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스웨덴의 한 중학교 교실 모습. 남자아이들이 뜨개질을 배우고 여자아이들이 공구를 다루는 기술을 배운다. 이성민 씨 제공
스웨덴 성평등은 교육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스웨덴의 한 중학교 교실 모습. 남자아이들이 뜨개질을 배우고 여자아이들이 공구를 다루는 기술을 배운다. 이성민 씨 제공
스웨덴 스톡홀름 공항 화장실에 들렀을 때 남자 여자가 함께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 개 화장실 입구에 남녀 구분이 없었다. 화장실 안에는 남자용 소변기와 남녀 함께 쓰는 양변기가 놓여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식당이나 호텔 화장실에도 남녀 구분이 없는 곳이 많았다.

지난해 11월 29일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스웨덴 사람들은 남녀평등에 대해 ‘광기(madness)’ 수준의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보도한 적이 있는데 실제 가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스톡홀름대에서 만난 한 여교수는 한술 더 떠 “우리는 성 평등을 넘어 아예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 사회적 구별을 없애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3년 전 스톡홀름 지사에 파견된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은 “부임 초 스포츠센터에 운동하러 갔다가 대부분의 여자들이 남자들도 들기 어려운 무거운 역기나 운동기구를 들고 운동하는 것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사무실에서 무거운 것을 들고 가는 회사 여직원을 도와주려다 남자들의 친절을 낯설어하는 표정이어서 머쓱한 적도 있다”며 “이 나라 여자들은 ‘여자라서 안 된다’는 금기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장난감도 남녀 구분 없어

성 평등을 향한 스웨덴인들의 다양한 시도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톱토이(Top-Toy)라는 장난감 회사는 지난해 말 여자아이는 인형, 남자아이는 총이라는 장난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성 중립적’ 장난감을 선보였다. 광고 카탈로그에도 여자아이들이 무기를 갖고 놀거나 남자아이들이 머리를 손질해주는 ‘미용실 놀이’, 다림질을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고 애완동물을 산책시키는 사진들을 대거 실었다.

스톡홀름 시내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한국 교포 이성민 교사(여)는 “취임 초 남녀 학생들의 그림을 따로 구분하기 위해 파란색 노란색 테이프를 붙여 놓았다가 아이들로부터 ‘왜 남녀를 구분하느냐’는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며 “학교에서도 남학생들에게 바느질과 요리를, 여학생들에게 각종 공구 다루는 법 등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에서는 회의 시작 전에 여교사들이 다과를 준비하고 설거지도 여교사 몫이었는데 이 나라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외계인 취급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이러다 보니 ‘남성성’에 대한 개념도 상당히 유연하다.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한다는 칼손 씨는 “나는 다른 아빠들과 차를 마시며 아이들 기저귀를 어떻게 하면 잘 갈아줄 수 있는지 팁을 공유한다. 남자가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남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아내가 임신 8개월인데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휴직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그에게 “일도 하고 가사도 돌봐야 하니 힘들지 않겠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제 마초 타입의 남자가 인기 많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히려 우리 남자들도 일에서부터 육아, 청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된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커리어도 쌓으면서 책임감 있는 아빠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더 남자다운 것 아닌가.”

스웨덴 남자들이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요한 씨(56)는 “내 어머니는 전업주부여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했고 아버지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TV 앞에 앉아 있거나 아이들과 잠시 놀아주고 서재로 가서 책을 읽곤 했다”면서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여자들의 경제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고 맞벌이도 늘면서 남자들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 일었고 정부 차원에서 지속적인 성 평등 교육이 이뤄져 우리 자식 세대들은 집안일이나 육아 등에서 거의 구별 없이 서로 돕는다”고 했다. 쇠데르퇴른대 페테르 스트란드브링크 교수(정치학)도 “70년대 초 아빠들에게 육아휴직을 쓰라고 하자 당사자인 아빠들은 물론이고 기업에서도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30∼40년이 흐른 지금은 아빠 육아휴직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

귀족사회였던 스웨덴은 18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상당수 여성이 남편에게 매질을 당해 아내를 때리는 남편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 정도였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도 1920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랬던 나라가 성 평등으로 방향을 튼 것은 여자들이 일하지 않고서는 경제성장을 할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우메오대 시스틴 알레브라트 교수(여성학) 말이다.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산업 국가들보다 사회보장 및 복지정책이 일찍 구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출산, 육아, 가사, 남편 내조는 여성의 고유한 역할이라는 고정관념도 오래 지배했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극심한 경제 불황이 닥치자 인구가 적은(900만 명) 스웨덴으로서는 결국 여성 고용을 늘려야 성장이 이뤄질 수 있다는 사회적 담론이 만들어졌고 이는 다양한 유인책으로 이어졌다.”

성평등 넘어 인간평등

기폭제가 된 것은 1971년 전업주부에게도 연말정산을 하도록 한 세제 개혁이었다. 이 제도는 한마디로 기존 부부 합산 과세에서 남편과 부인이 세금 신고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도록 개별과세로 바꾼 것이다. 스톡홀름대 프레이덴발 교수(여·정치학)는 “여성의 일이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는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경제적 독립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임을 자각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며 “여성들의 자립 의지가 강해지고 부부 합산과세에 따른 누진제를 피할 수 있다 보니 여성들의 일할 의지가 크게 향상됐다. 결국 이는 가정 내 소득을 끌어올리며 경제성장의 발판이 됐다”고 전한다. 실제로 구스타브손 등의 연구(85년)에 따르면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기혼 여성들의 근로시간이 0시간에서 전일제로 증가했을 때 1967년에는 가구당 가처분소득을 43% 증가시키는 데 그쳤으나 세제 개혁 후인 1973년에는 67%까지 끌어올렸다.

전업주부 비율도 지속적으로 줄었다. 1968년 전체 여성 중 전업주부 비율은 36.7%였으나 현재 5%대 수준까지 감소했다. 특히 7세 이하 자녀를 둔 전업주부 비율이 74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8%대 수준으로 줄었다. 2012년 스웨덴 전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과 7세 이하 아동을 둔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75% 수준으로 비슷해 자녀 양육이 경력 단절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스웨덴 정부는 71년 세제개혁에 이어 72년에는 아예 총리 직속으로 ‘성 평등 대책위’를 두고 여성 정책을 쏟아냈다. 이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이 80년에 도입된 성 평등 옴부즈맨 제도. 여자건 남자건 국민이 성차별을 당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일종의 신문고 제도라 할 수 있는데 반드시 조사 결과를 신고인에게 통보해야 하며 사안에 따라 사법부에서 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엄격하다. 옴부즈맨들은 각 대학과 기관, 관공서 지방자치단체에 실핏줄처럼 퍼져 상주한다.

이런 제도가 가능했던 것은 성 평등이 단지 남녀 차별의 문제가 아닌 궁극적으로 법 앞에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는 시민권의 확대라는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우메오대 알레브라트 교수는 “100년의 역사를 두고 스웨덴 국가가 이루어온 민주주의 핵심 가치는 자유 평등 연대이다. 이들 가치는 단지 빈부 격차만을 줄이는 게 아니라 성의 불평등 문제, 특히 사회 구성원의 절반인 여성의 불평등에서 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 왔다”고 소개했다.

요즘 스웨덴의 성 평등을 향한 노력은 유아교육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7월 영국 공영방송 BBC는 스톡홀름에 있는 한 어린이집을 보여주며 이곳에서 하고 있는 성 평등 유아교육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이곳 교사들은 ‘he(그)’나 ‘she(그녀)’ 같은 성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를 피하고 ‘친구(friends)’란 말로 통칭하거나 직접 이름을 불렀다. 또 ‘잠자는 숲 속의 공주’나 ‘신데렐라’처럼 과거 남녀나 부모의 역할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책은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았다. 장난감을 배치할 때에도 여아(女兒)들이 갖고 노는 인형과 남아(男兒)들이 갖고 노는 자동차를 교묘하게 같이 배치해 성별 구분을 없앴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손에 집히는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있게 한 배려였다.

어린 자녀 둔 여성 75% 경제활동

기자가 스웨덴을 방문했던 9월은 마침 어린이집 방학 기간이어서 아이들이 실제 노는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린이집 교사를 맡고 있는 한국 거주 교민들을 통해 듣는 이야기는 비슷했다. 한 교사는 “아이들에게 사회에서 기대하는 성역할을 교육하지 않으며 행동의 선택권을 넓혀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이 나라 모든 교육기관이 내세우고 있는 가치”라며 “이곳 아이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여자아이들의 세상’, ‘남자아이들의 세상’이란 게 없다. 교육 관계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이들로부터 기대되는 역할을 주입시키면 아이들의 가능성을 제한시킨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여론도 있다. 평등에 집착한 나머지 돈과 자원을 부적절한 곳에 배분한다는 지적이다. 한 대학 교수는 “1세에서 5세 사이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역할 구분을 없애려는 시도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며 “나는 그런 시도들이 실제 효과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할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편 이 나라의 일하는 여성은 2010년 현재 전체 여성 경제활동인구의 80% 수준이며 여성의 임금은 동일 직종 내 남성의 93% 수준이다. 스웨덴도 기업 내 여성이사 비율은 아직 20%대에 불과하다. 이를 40%대까지 늘리는 의무화 법안이 제출돼 있으나 “오히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늘릴 수 있다”는 의견이 팽팽해 잠복 중인 상태다. 다만 정치 분야에서 스웨덴 여성의원 비율은 94년 이후 한 번도 4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스톡홀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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