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가 의사야? 남자의사 불러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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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여성시대]2부 전문직<6>여의사 下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어? 얼라네? 하이 참.”

진료실에 들어온 할아버지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이렇게 경상도 말투로 말했다.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의사가 젊은 데다 여자라는 사실에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너무 젊은데 아가씨가 진짜 의사 맞아” 하며 여의사 앞에서 계속 딴소리만 했다. 증상을 묻자, 무시하듯 반말로 대답하기까지 했다.

박성지 삼성서울병원 순환기내과 교수(40)는 몇 년 전 자신을 찾아온 이 환자에게 단호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희 두 사람은 지금 남녀로 만난 것도 아니고, 연령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환자와 의사로 만난 것입니다.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실 거면 당장 진료실에서 나가십시오.”

○ “어이∼ 의사 아가씨”

매년 배출되는 3000여 명의 신규 의사 중 3분의 1이 여성이지만 아직까지도 환자나 보호자들 중에는 여자 의사에 대해 불신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예 대놓고 “여자는 믿을 수 없으니 남자 의사를 데려오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응급실 여의사에게 ‘언니’ ‘저기요’라고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 여의사는 “여자 진료 과장이 가르치는 후배 전공의들과 함께 회진을 돌면 환자들 중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외모의 남자 후배 전공의를 붙들고 질문하는 어른들도 많았다”고 회고한다.

김미란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48)는 “인턴 시절, 실습을 하러 내과 병동에 들어갔더니 환자들이 ‘의사 아가씨, 오늘은 줄무늬 티셔츠 입었네’라며 휘파람을 불었다”며 “여자가 담당 주치의라는 사실에 마뜩지 않은 티를 내던 환자도 있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박윤아 삼성서울병원 외과 교수(39)는 “결국 환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결과와 신뢰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큰 외과 수술을 할 때 순간적인, 과감한 판단력을 요했다. 그래서 여의사보다는 남자 의사가 낫다는 편견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상의학이 발달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배를 열기 전에 알 수 있다. 오히려 요즘에는 수술이 시작되기 전 차근차근 계획적이고 정교하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의 섬세함이 더 부각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사자의 심장에 여성의 손이 더해질 때

외과에서는 외과의사의 3대 덕목으로 ‘사자의 심장’ ‘독수리의 눈’ ‘여성의 손’을 꼽는다. 과감한 판단력과 냉철한 눈 이외에 여성의 섬세한 손기술을 요한다는 뜻이다. 꼭 여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만큼 여자의 손기술을 높게 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의사들은 “결국 정성과 실력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편견을 가질지라도 환자야말로 누가 정성을 들여 상처 드레싱을 하는지, 누가 좀 더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지 알게 된다는 것.

환자들과의 ‘소통력’도 여의사들의 장점이다. 과거에는 의사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맘 편하게 질문하기가 어렵다”는 불만이 많았다.

한 내과 여의사는 “환자 보호자들의 연령이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처한다. 보호자가 젊은 편일 경우 인터넷으로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온다. 이때 잘못된 의료지식을 갖고 있을 경우 논리적으로 대답을 해준다. 요즘 환자들에게 ‘다 잘될 테니 안심하라’고 하면 납득을 하겠는가. 이런 경우는 되도록 깊이 있는 학술 내용이나 데이터를 통해 설명을 해준다. 반면 노년층일 경우 심리적인 안정을 원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때로는 손을 잡으며 안심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한 번만 보고 말 사이라면 남자 의사를 선호할 수 있지만 장기간 입원하거나 매일 반복적으로 접할수록 여의사를 선호할 여지가 크다.

같은 성별이라는 점 때문에 환자가 숨겨둔 속내를 툭 터놓는 경우도 있다. 김수진 서울성모병원 비뇨기과 교수(35)는 “비뇨기과 하면 남자 환자만 볼 것 같지만, 생식기나 배뇨작용과 관련해 여자 환자들도 병원을 자주 찾는다. 연세가 있는 여자 환자들은 요실금이나 성기능 문제에 대해 말 꺼내는 걸 꺼리는데 여자 의사에게는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자기 관리 능력’을 여의사의 장점으로 꼽는 의견도 있었다. 신경외과 전문의 A 씨는 “밤에 의사 2명이 당직을 서는데 한 명은 오후 10시∼오전 3시에 잠을 자고, 나머지 한 명은 오전 3∼7시에 잠을 자는 것이 룰이었다. 경험적으로 여자들은 알람을 여러 개를 해놓고서라도 그 시간에 일어나는데, 남자 의사들은 잠들면 아무리 깨워도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밤새 여의사 혼자서 당직을 서게 된다. 그래서 여의사들끼리 ‘남자를 절대 먼저 재우면 안 된다’고 암묵적인 룰을 만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 ‘관계 지향적 리더십’이 강점

여의사들의 고민은 또 있다. 남자가 많은 조직에 홀로 또는 소수의 여자들이 처음 들어가면서 겪는 문화적 충격이 그것. 알파걸 중의 알파걸로 성장한 여의사들에게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은 그 강도가 더 크다는 것이다. 김미란 교수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딸만 다섯인 집 장녀로 남녀 차별을 전혀 모르고 자라다가 의대 입학 후 ‘어디 여자가…’라는 말을 하는 동료들을 만났을 때 내가 마치 별천지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4000명 학생과 학부모들을 놓고 학교 행사 사회를 보기도 했다. 여중, 여고에서도 반장을 도맡아 했다.

그는 ‘여성은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경우. 아버지가 자신의 의과대학 입학을 축하하며 선물로 주었던 미국 대통령들의 리더십에 대한 책 중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아침에 빵을 구워 주는 아주머니들 이름까지 일일이 외워서 “○○ 여사, 빵이 무척 맛있었습니다”라고 말한 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김 교수의 말이다.

“환자 이름이나 병원에서 일하는 사원들의 이름을 열심히 외웠다. 예를 들어 다른 교수들은 매달 3, 4명씩 그룹을 지어 여러 과를 순환하는 인턴들 이름을 외우지도 않고 ‘야, 인턴’이라고 불렀다. 나는 연상법까지 동원해가며 이름을 열심히 외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니 인턴들 50여 명이 주요 진료과에 모두 배치됐다. 다른 과에 부탁하거나 협력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과 이야기가 잘 통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가 맡은 보직은 ‘입원부장’. 병실 운영과 관련해 모든 진료과 및 행정부서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환자가 불편함이 없도록 각 부서를 통괄해 진두지휘하는 것이다.

여성의 관계지향적인 측면을 오히려 살린 리더십도 있다. 송근정 삼성서울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여성들은 집안 대소사나 사소한 일,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집단이다. 조직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부분에도 여자 의사들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남자 전공의나 전임의의 부인이 출산을 할 경우 휴가를 하루 정도 주는 게 관행이었다. 하지만 송 교수는 남자 후배 의사들이 3일 또는 가능하면 그 이상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송 교수는 “모성애, 엄마 같은 리더십이 오히려 조직에 더 필요하다. 아이든, 간호사나 다른 의사든 간에 작은 실수는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가끔은 야단치기보다는 오히려 외부로부터의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지현 오피니언팀 기자 isityou@donga.com
#여자#의사#섬세함#소통력#불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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