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차관급 대표 내세우며 南엔 장관급 요구

[오늘 남북당국회담 무산]
■ ‘6년만의 회담’ 왜 무산됐나

회담 준비 끝냈지만…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의 그랜드힐튼호텔 2층에 마련된 남북 당국회담장. 11일 회담 테이블도 설치됐고 회담장 앞에는 레드카펫도 깔렸지만 남북이 종일 회담 수석대표의 ‘격’을 놓고 대립하다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연락관을 철수시켜 12일로 예정됐던 회담은 무산됐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결국 격(格)의 문제였다.

12일 예정됐던 남북 당국회담은 북한이 남측 수석대표의 격을 문제 삼으면서 일단 무산됐다. 당초 ‘한국 통일부 장관 대(對)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회담을 희망하며 격을 중시했던 것은 남한이었다. 남측은 북한이 통보한 대표단을 수용하고 그에 맞춰 차관급 수석대표를 내세웠다. 그러자 북한은 장관급에서 차관급으로 낮아진 남한 대표단의 격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회담 자체를 무산시켰다. 후속 남북접촉 일정이 잡히지 않은 데다 북한이 “회담 무산의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고 선언했다.

○ 북 “남측 장관급대표 안 나오면 회담 불가”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11일 회담 무산을 발표하면서 “북측이 남측의 장관급 수석대표가 나오지 않으면 당국회담을 열 수 없다며 일방적으로 12일 북측 대표단 파견을 보류한다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날 북한은 북측 수석대표로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통보하면서 이를 ‘상급(相級)’ 대표라고 주장했다. 외형상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북한에서 외무상, 재정상 등 ‘상급’ 직위는 장관급에 해당한다.

정부 당국자는 “통전부장을 수석대표로 하라는 남측 요구에 북한이 여러 차례 부정적 회신을 보내와 남측 수석대표도 장관급으로 하는 방안을 배제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과거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과 장관급으로 보기 어려운 북한 내각 책임참사 간에 남북 장관급회담을 했지만, 이 같은 불평등하고 그릇된 관행을 이제는 정상화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당국자는 “북한 조평통 국장의 위상과 역할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강지영 국장은) 장관급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며 “우리 측 수석대표인 김남식 통일부 차관은 절대 북측 수석대표의 격보다 낮지 않다”고 말했다. 남한은 이처럼 북한에 맞춰 수석대표의 격을 장관급에서 차관급으로 낮췄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 의제를 고루 다룰 수 있는 책임자급으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 북, 지원인력에 원동연 배치… 6·15에 집중

반면 북한은 원동연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을 지원인력(보장성원) 명단에 집어넣는 등 변칙적으로 대표단을 짰다. 원 부부장이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왔다면 사실상 회담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자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평가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에서 원동연 부부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아 강지영 국장보다 직급이 높은데도 회담에 직접 참여하는 수석대표로 삼지 않은 것은 남측을 상대로 기 싸움을 벌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약 회담이 열렸다면 실질적인 내용은 원 부부장이 모두 배후에서 조종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은 대표단에 6·15선언 남북 공동행사에 특화된 전문가들을 집중 배치했다.

북측 수석대표인 강지영 국장은 남북 민간교류, 공동행사 업무에서 경력을 쌓아온 인물이다. 1956년생으로 김책공업대를 졸업한 그는 1988년 남북 학생회담의 북측 준비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6·15공동선언 남북·해외 공동행사의 북측 준비위원, 해외동포사업국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등을 지냈다. 그가 2006년 6월 한국을 방문한 것도 ‘6·15민족통일대축전’ 공동행사 참석을 위한 목적이었다. 이번 남북회담을 앞두고 열린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6·15선언 공동행사 개최를 의제로 집어넣자고 줄곧 요구했던 북한이 대표단 구성에도 같은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9일 판문점 실무접촉에 나왔던 김성혜 조평통 부장도 대표단에 포함됐다. 그녀 역시 6·15축전, 8·15행사 등 남북공동행사 협상에 수차례 관여한 인물이다. 북한이 실무접촉 때와 마찬가지로 당국회담에서도 공동행사 개최를 고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종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은 남북회담에 여러 번 모습을 드러내 남측에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전 부국장은 남북교류가 활발하던 2007년 한 해에만 모두 7번의 남북회담에 북측 대표로 참석했던 베테랑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회담 경험이 부족한 강지영, 김성혜를 보좌하는 목적으로 보인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