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정부 “급한 쪽은 北… 꼼수에 끌려다니지 않을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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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남북당국회담 무산]
■ ‘格에 맞는 남북대화’ 원칙 고수… 회담 무산 남북의 득실은

박근혜 대통령이 11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남북 당국회담에 대해 “한반도 평화정착과 신뢰관계 구축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수석대표의 ‘격’ 문제로 12일로 예정됐던 회담은 무산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11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남북 당국회담에 대해 “한반도 평화정착과 신뢰관계 구축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수석대표의 ‘격’ 문제로 12일로 예정됐던 회담은 무산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이 유엔이나 미국하고 회담할 때도 그런 식으로 하겠나.”

박근혜 대통령은 10일 열린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남북 당국회담 수석대표의 ‘격’에 대한 원칙을 정하며 이같이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박 대통령은 “북한과도 일반 국가와 외교하듯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출 필요가 있다. 예전처럼 하지 않고 남북한이 서로 격을 맞추는 것이 국민 정서와도, 세계 관례와도 맞는 것”이라는 뜻이 확고했다고 한다. 11일 수석대표 명단 교환 과정에서도 박 대통령의 이런 의지가 강력히 반영됐다. 회담 무산 직후 청와대 관계자가 “북한이 첫 회담에 임하면서 과거 해왔던 것처럼 상대에게 존중 대신 굴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것은 발전된 남북관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것도 대통령의 이런 원칙에 따른 것이다.

○ 박 대통령, “회담 무리하게 성과 낼 필요 없다”

박 대통령은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회담에 임하면서 무리하게 속도를 내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하라는 기본원칙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이 얽힌 현안은 한 번에 해결될 수 없는 만큼 첫 당국회담에서 굳이 북한으로부터 많은 약속을 얻어낼 필요가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개성공단 정상화, 금강산 관광 재개, 이산가족 상봉 등을 주요 의제로 삼겠지만 어느 논의도 12, 13일 회담에서 완결 짓기보다는 북한의 의견을 듣고 우리의 뜻을 충분히 전달하는 쪽으로 기류를 잡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북한이 유연한 제안을 해올 경우 그에 상응해 유연하게 할 수 있다는 전략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북한이 당국 간 대화 제의에 응하기는 했지만 과연 대화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지, 단순히 시간을 벌기 위한 ‘쇼’인지 예단하지 않고 예의주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북한이 9일 판문점에서 열린 실무접촉에서 ‘남북 당국회담’을 주장하거나 명단을 회담 예정일 하루 전까지 제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북한의 다양한 패턴 중 하나”라며 차분하게 지켜봤다고 한다.

이런 회담 전략에는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인식도 깔려 있다. 따라서 북한의 태도가 변화하지 않는 한 우리 정부가 먼저 북한에 추가 제안을 할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27일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 전에 무리하게 남북회담을 진행해야 할 이유도 없다.

청와대 관계자는 “온 국민이 이 과정을 다 지켜봤고 (협상 과정을) 투명하게 했기 때문에 국민들도 똑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박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첫걸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대화의 문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은 채 북한의 태도를 지켜보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이날 회담 무산을 통보하면서 “대표단 파견을 보류한다”며 다소 유보적인 표현을 사용한 만큼 냉각기를 거쳐 전향적인 태도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 대화 기회 걷어찬 북한

북한은 어렵게 얻은 대화의 기회를 걷어찼다. 전격적으로 대화에 응할 듯이 나오다가 이날 오후 태도가 돌변해 “무산 책임은 남한에 있다”고 반발한 것도 북한에 대한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대목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당장 “북한의 대화 제의가 미중 정상회담을 앞둔 미봉책 아니었느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북한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만남에 앞서 선제적으로 대화 공세를 펴기 위해 남북 대화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예상 외로 강경한 미중 양국의 태도에 다시 본색을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이제 북한은 이런 의심이 쌓이면서 더 냉랭해진 박근혜정부와 마주해야 한다.

남북 대화가 어이없이 어그러진 상황에서 북한이 기대하는 북-미 대화는 말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이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은 어느 때보다 완강하다. 대화 분위기를 띄워 보려던 중국도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이 27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다시 한 번 강도 높게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커 한중 협공으로 돌파구가 막혀버리는 셈이다.

극적 반전이 없을 경우 북한으로서는 더욱 심화된 고립과 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이 대북 제재를 완화하지 않고 ‘돈줄’이었던 개성공단 정상화도 지연되면서 춘궁기를 지나고 있는 북한의 내부 사정은 더욱 악화될 위기에 놓여 있다.

동정민·이정은 기자 ditto@donga.com
#북한#남북당국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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