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젊은 보수의 놀이터인가, 맹목적 反진보의 아지트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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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0만명 클릭 극우성향 집합소 ‘일간베스트저장소’ 대해부

하루 100만명 클릭 극우성향 집합소 ‘일간베스트저장소’ 대해부
《 강경 우파 성향의 누리꾼이 많이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이 커뮤니티의 일부 이용자들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부른다. 호남지역을 향해서는 ‘북한의 7시 멀티(‘본거지 외의 지역 거점’을 뜻하는 인터넷 유행어)’라 칭한다. 한반도에서 시계의 7시 방향인 호남을 친북한적 지역이라고 비아냥대는 표현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합성사진을 유포하며 진보좌파 진영에 맹목적인 적대감을 드러낸다. ‘민주화’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것을 총칭하는 의미로 왜곡해 유행어처럼 쓴다. 일베는 매일 4만 개 이상의 게시글과 수십만 개의 댓글이 올라오는 대형 커뮤니티다. 대선기간이 포함된 지난해 12월 4일부터 올해 1월 3일 한 달 동안에는 페이지뷰(게시물 클릭 수)가 10억 건을 넘을 만큼 이용자가 많다. 국내 1위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페이지뷰는 지난해 10월 206억 건 정도였다. 일베의 최근 일일 이용자는 70만∼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여론 집합소 역할을 하는 이곳에서 왜 억지스러운 주장이 유통되는 걸까. 》

○ 강경 우파의 집합소 ‘일베’의 기원

일베는 강경 우파 성향의 글들이 올라오는 사이트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운영자 ‘새부’(‘새침부끄’의 약자)는 공식적으로 특정 이념을 지지하진 않는다. 그가 최우선시하는 가치는 ‘재미’다. 새부는 공지사항에 “일베는 유머 위주의 커뮤니티다. 자유로운 의견의 표현과 풍자가 보장되며 정치적 성향에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런 일베가 왜 강경 우파의 집합소가 된 걸까. 지금의 일베는 2010년에 만들어졌다. 처음엔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올라온 글 중 재미는 있지만 선정적이거나 편향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삭제된 글을 따로 모아두는 유머 사이트였다.

일베 운영자인 새부의 정체는 아직 공개된 바 없다. 본보 취재 결과 운영자로 유력시되는 사람은 서울의 대형병원 의사인 A 씨다. 30대 남성인 A 씨는 2011년 8월 ‘일베저장소’라는 상표권을 처음 한국특허정보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A 씨는 지난달 본보 취재진이 찾아갔을 때 “일베에 대해선 할 말 없다. 자꾸 이러면 안전 요원을 부르겠다”며 취재를 극구 피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운영 능력으로 따지면 기적적인 성공을 거둔 일베의 운영자들이 끝내 자신들의 신원을 드러내지 않는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세간에선 ‘일밍아웃’(일베+커밍아웃)을 극도로 꺼리는 일베 특유의 문화를 그 원인으로 추정한다.

‘일밍아웃 기피’는 일베 이용자들이 공유하는 커뮤니티 문화다. 삭제되는 게시물들을 모아두는 사이트다 보니 이용자들은 ‘마이너 의식’이 강했다. 스스로를 ‘장애인’ ‘병신’이라 부르고 일베 이용자임을 외부에 드러내는 걸 숨기면서 자기 비하적 유희를 즐겼다.

익명으로도 회원 가입 및 글쓰기가 가능한 일베는 메이저에 대한 반발심리로 이용자 간의 수평적 평등과 철저한 원자화를 추구했다. 이용자끼리는 반말을 썼다. 특정 이용자가 유명해지는 것도 경계했다. 친목활동도 금기시했다. 이용자끼리 친해지면 그룹화가 이뤄져 분열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 젊은 보수우파의 ‘마이너 의식’

국내에 인터넷 문화가 확산된 1990년대 후반 이래 온라인상의 주도권은 단연 진보좌파가 쥐고 있었다. 젊은 세대가 만들어가는 온라인 여론은 포털 다음의 아고라를 중심으로 진보 성향의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사태를 거치면서 그동안 온라인상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젊은 보수의 ‘반(反)진보 프레임’이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광우병은 공기로도 전염된다” “미국 소를 먹으면 모두 죽는다”라는 식의 황당한 루머나 “시위하던 여대생이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식의 거짓말이 일부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진실인 양 확산되자 젊은 보수들의 반감과 피로감도 고조됐고 인터넷에 젊은 보수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소수의 위치인 젊은 보수에게 일베는 마이너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놀이터였다. 이용자가 늘어나자 일베는 삭제 글을 모아두는 차원을 넘어 자체적인 콘텐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베에는 진보좌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글이 쏟아졌다. 진보좌파에 대한 반발심은 호남 비하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공격, 민주화 왜곡 등으로 이어졌다.

재미를 추구하는 유머 사이트라고 스스로를 밝히고 있듯이 일베에서는 반진보 성향도 주로 희화화 형태로 표현된다. 노 전 대통령과 코알라를 합성한 ‘노알라’ 사진을 만들어 유포하는 식이다.

일베 운영자는 게시판에 기존 취지와 달리 정치적 성향이 담긴 글이 다수 올라오자 2011년 10월 ‘정치 일간베스트’와 ‘정치 게시판’을 따로 만들었다. 하지만 반진보좌파 성향은 이미 일베의 지배적인 기조로 자리 잡았다.

일베가 재미에 이어 중시한다고 주장하는 원칙은 ‘팩트(Fact)’다. 감성을 자극하는 소재를 내세워 논리를 덮는 이른바 ‘감성팔이’에 대한 반발이다. 여기엔 과거 일부 진보좌파 진영이 사실관계보다 감성을 앞세워 공감을 호소하던 방식에 대한 젊은 보수의 분노가 담겨있다.

보수 성향인 박정희 이명박 전 대통령을 치켜세우는 글을 올릴 때도 당시 정부의 경제성장 지표 등 통계나 실제 일화를 첨부한다. 보수 진영을 칭송하는 글이라도 근거 없이 주장만 적은 글이 올라오면 어김없이 “팩트를 내놔라”라는 댓글이 달린다.

○ ‘여성 혐오’로 응집

일베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여성 혐오’다. 일베 운영자는 처음부터 이용자가 여성임을 밝히는 걸 금지했다. 여성 이용자가 나오면 호감을 얻으려 접근하는 남성이 생겨날 거고, 그러면 이용자 간 그룹화가 이뤄져 분열된다는 이유였다.

일베에 올라오는 글을 분석해보면 이용자는 대부분 남성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경제력 등 조건만을 중시하는 일부 한국 여성의 세태를 보여주는 글이나 사진, 동영상 등을 게재하고 이에 댓글을 달며 여성에 대한 혐오를 키워 갔다. 일베에는 “한국 여성은 만나면 안 된다” “국제결혼이 답이다”라는 유의 글이 즐비하다.

일베 이용자들은 “우리의 혐오 대상은 여성 전체가 아니라 남성의 경제력이나 조건을 지나치게 따지는 이른바 ‘김치녀’”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여성 혐오는 반진보 성향과 함께 일베를 응집시키는 양대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여성 이용자가 많은 포털 서비스 ‘네이트 판’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여성시대’ ‘쭉빵까페’ 등을 적대시하며 내부 결속을 도모한다.

○ ‘자가당착’에 빠진 일베

일베는 정치적 이슈인 총선과 대선이 치러진 지난해부터 급속히 성장했다. 온라인 시장조사분석 업체인 랭키닷컴에 따르면 PC 기준으로 일베는 2011년 상반기 월평균 방문자가 20만 명 남짓이었지만 총선이 있던 지난해 4월엔 93만 명, 대선 기간인 지난해 12월에는 211만 명을 돌파했다.

일베는 규모가 커질수록 점점 자가당착에 빠져갔다. 그들이 비판해온 ‘진보좌파의 폐쇄성’을 닮아갔다. 일베의 진보 진영에 대한 반감은 맹목적으로 변해갔다. 운영자가 지난해부터 수차례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의 고소 대상이 될 만한 글은 자제해달라”고 당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일베의 일부 이용자는 자신의 성향을 정당화하기 위해 팩트를 왜곡하거나 외면하면서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왜곡하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에게 총격을 가했다” “최초 사망자가 경찰이다” “북한군이 광주 시민을 선동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팩트’로는 일부 강경 보수인사의 글이나 일부 탈북자들의 확인되지 않은 증언 등을 내세웠다.

5·18 왜곡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일베는 최근 모든 광고가 끊겼다. 일베 운영자는 “초심을 잃지 않는 기회로 삼겠다”는 글을 올렸다.

최근 일베에 5·18민주화운동 때 희생당한 아들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사진을 두고 ‘홍어 택배’라고 비하하는 게시물이 올라오고, 이에 민주당이 일베 운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언급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실제로 소셜미디어 분석업체 트리움이 일베 역대 추천수 상위 100개 게시물과 댓글을 분석한 결과, 언급 빈도수가 높았던 키워드의 대부분이 ‘X발’ ‘개XX’ ‘병X’와 같은 비속어였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베가 특정 개인과 집단을 비하 및 모욕하며 적대심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분명한 문제”라며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해 적개심을 유발하는 표현은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는 “내 표현의 자유가 타인이 가진 표현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표현의 자유는 무한히 허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베는 일부 진보좌파 진영의 온라인상 독선이 불러온 산물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베에서는 “진보진영은 그동안 인터넷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보수 세력에 대한 모욕과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아 왔지만 그럴 때마다 표현의 자유만 내세우면 뭐든 용인되더라. 우리도 너희가 지난 10년 동안 해왔던 방식으로 똑같이 갚아주겠다”라는 주장이 지지를 얻고 있다.

일베의 대두가 그동안 진보 진영이 주도해왔던 온라인 여론에 좌우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일부 일베 이용자들의 최근 행태는 그들이 비판해온 ‘괴물이 되어버린 온라인 좌파의 독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동주·구가인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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