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 시프트]<3> 일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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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 무관심 무책임… 위기의 열도
3無 뚫고 日 재건할 새 리더십 열망

《 올해 일본 주요 신문 신년호에서 두드러진 단어는 ‘리더십’이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위기를 뛰어넘을 통치능력을’ 제목의 1일자 신년 사설에서 일본의 재정 파탄을 우려하며 “지금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불퇴(不退)의 각오와 국민들이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설득력”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 정치권에서는 새해 벽두부터 중의원 해산과 총선 논의가 뜨거워지면서 계파별 이합집산이라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 재연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출범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소비세(부가가치세) 인상 논란 속에 지지율이 반 토막 나면서 또 다른 단명정권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결정하는 격변의 2012년이 시작됐지만 일본은 여전히 내부에 발목이 잡혀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브레인이었던 보수논객 나카니시 데루마사(中西輝政) 교토대 교수는 “주변 지역과 세계의 변동 속에 일본 정치 무력화와 국내의 무관심이 계속되면 몇 년 안에 파국이 도래할 수 있다. 국가의 존속 자체가 곤란한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
○ 제3의 패전…높아가는 위기의식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인 2ch(2채널)에는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토론방 개설이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 ‘경기 최악’ ‘취직 최악’ ‘학력 저하’ ‘정치 최악’ ‘부채 1000조 엔 곧 돌파’ ‘대학은 삼류…’ ‘좋은 게 하나도 없다’는 어두운 내용이다. ‘비관론 중독증’이라는 비판까지 나올 정도다.

글로벌 무대에서 일본의 위상은 쇠락하고 있다. 특히 일본 문화의 확산을 의미하던 ‘재퍼나이제이션(Japanization·일본화)’은 ‘정치 무능이 초래한 장기침체’로 의미가 바뀌어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됐다.

일본 지식인 사회의 위기감은 최고조 상태다. 통상산업성 관료 출신으로 저명한 평론가인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씨는 ‘긴급경고, 제3의 패전’이라는 책에서 현재의 일본을 1860년대 막부 말기 구미 열강에 문호를 개방한 제1의 패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에 이은 세 번째 패전으로 규정했다.

취약한 리더십은 국민의 심리적 좌절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1990년에 태어난 와세다대 3학년 모리카와 유키(森川雄基) 씨는 “취업난도 심각하지만 취업해도 숨이 막히는 사회구조”라며 “일본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지만 우리 힘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더욱 힘들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런 좌절감은 극단적인 무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 도쿄대 교수는 “지난해 수업 중 학생들에게 ‘(중국과의 충돌로)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가 위험하다’고 말을 건넸는데 대부분 학생들이 남의 일처럼 ‘빼앗겨도 별 상관없잖아요’라고 응답해 깜짝 놀랐다”고 소개했다.(주오고론·中央公論 작년 9월호)

○ 속수무책 리더십에 국민 인내 한계


가장 큰 위기는 일본 리더십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최근 5년간 총리 6명이 교체되는 등 단명 정권은 만성화되다시피 했다. 일본 국민은 3·11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과 혼란을 그 대표적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총리들의 리더십은 심지어 중고생들 사이에서도 희화화됐다.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를 빗댄 간루(菅る)는 “아무것도 안 하고 노닥거린다”는 뜻으로 굳어지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를 빗댄 ‘하토루’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말할 때마다 내용이 바뀌고, 나쁘다는 생각도 없이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다.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최근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기고문에서 “리더를 배출할 수 없는 정치 시스템 때문에 (일본 국민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정치 시스템은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총리를 집권당 계파 간 거래와 협상에 따라 선출하다 보니 미국과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나 소비세 인상 등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굵직굵직한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김성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과거사 문제는 일본의 도덕성에 치명적”이라며 “일본이 추진해 온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일본 국민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했다. 아사히신문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의 70%는 총리를 직선제로 뽑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오차노미즈여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일본 서점가를 강타한 ‘일본인의 자존심’에서 현재의 일본 사회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지럽혀진 방”에 비유하며 “복합중층 문제에 봉착한 일본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축을 일거에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 2012년은 일본 리더십 재건 분기점


야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은 새해 벽두부터 노다 총리에게 “소비세 인상안 국회 제출에 앞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라”고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노다 총리도 결전 의지를 굳히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소비세 인상안이 올봄 정기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노다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자신의 자문역인 전직 총리에게 밝혔다고 3일 보도했다. 이런 가운데 소비세 인상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면서 새해 총선 및 정계개편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
노다 요시히코 총리
총선을 겨냥한 정치인들의 이합집산과 별도로 일본 국민은 새로운 리더십 출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정계 개편의 핵으로 떠오른 43세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신임 시장에게 모아지고 있다. 일본 국민은 ‘강력한 리더십을 위해 독재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에게서 메이지유신을 떠올리고 있다. 중앙이 아닌 지방, 기성 정당이 아닌 풀뿌리 지역정당에서 리더십 대전환의 계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여야 정당은 앞다퉈 하시모토 시장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하시모토 시장도 자신이 이끌고 있는 오사카유신회를 통해 공공연히 중앙 정치무대 진출을 밝히고 있다. 정치가 양성소인 ‘유신숙’(塾·학원이라는 의미)도 만들기로 했다. 일본 정치 구조상 하시모토 시장이 당장 중앙 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하시모토발 변화의 바람이 중장기적으로 일본 정치에 화학적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이와 맞물려 새해 총선에서 포퓰리즘에 영합하기보다 소비세 인상을 통한 재정 재건을 앞세운 노다 총리가 승리한다면 일본 리더십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일각에서는 강력한 리더십 재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나고야(名古屋) 지방지인 주니치신문은 최근 사설에서 “정치불신이 강력한 지도자 대망론으로 연결돼 독재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생긴다”며 “나치의 독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부의 독재를 허용한 것도 바로 국민이었다”고 경고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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