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은 시대]김정일의 前 개인교사 김현식 교수 ‘제자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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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문은 뚫렸고 둑도 터졌소”

《 여든 살의 노(老)스승은 제자 김정일의 순진무구했던 어릴 적 시절을 떠올리며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1971년부터 20년 동안 김일성 처가 쪽 아이들의 개인교사로 활동했던 김현식 전 평양사범대 러시아과 교수(사진). 1992년 망명해 지금은 미국 워싱턴 근교 조지메이슨대 연구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김 교수를 25일 오후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에 위치한 자택에서 만났다. 4시간 동안 이뤄진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김 교수는 김정일에게 주려고 정성껏 썼던 편지를 손에 들고 아쉬워했다. 김 교수는 북한이 김정일 사망을 발표하던 순간인 18일 밤 10시(현지 시간) 대학 연구실에서 제자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를 막 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
김 위원장, 지금 세상은 온통 뒤집히고 있소. 이 거세찬 소용돌이에 당신이 지키고 있는 평양성이 휘말리지 않을 것 같소? 역사의 흐름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서도 막아 낼 수 없소. 이 무서운 격랑을 잠재울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이 세상에는 없다고 보오. 이런 격동의 시기에, 20대의 아들에게 평양성을 지키라고 넘겨주었으니….
▶ (영상) 김정일의 가정교사 김현식 “순수한 아이였는데…

당신이 그렇게도 믿었던 세계 여러 나라에 나가 있는 대외 사업 일꾼들과 간부들, 일반 주민들까지 2만 명 이상이나 벌써 당신을 등지고 살길을 찾아 세계 여러 나라에 탈북 망명하였소. 이 세찬 탈북, 망명의 흐름을 당신은 언제까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평양성의 문은 이미 뚫렸고, 물막이 둑은 터졌소. 김 위원장, 이 스승의 진정 어린 충고를 귀담아듣고 어서 빨리 결단 내리길 바라오. 나는 스승으로서 제자인 당신이 제2의 후세인, 제2의 카다피가 되는 걸 원치 않소. 이웃나라 중국처럼 개혁 개방하는 길을 따르면 어떨지요?

1970년대 초, 출장으로 평양-모스크바 국제열차로 중국 땅을 횡단할 때, 열차가 멈춰서는 역마다 헐벗고 굶주린 중국 사람들이 떼 지어 밀려와서 먹을 것을 구걸했소. 그것이 엊그제 같은데, 중국은 지금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이나 일본과 맞서고 있소. 그러한 급성장은 개혁 개방의 결과라고 생각하오. 북조선도 경제구조를 바꾸고 문호를 개방하면 이른 시일 내에, 중국을 따라 앞설 수 있을 것이오. 북조선 사람들은 얼마나 근면하고 슬기롭소. 당신의 조부모인 김형직 선생과 강반석 여사는 열렬한 애국자이고 진실한 기독교인이었소. 그들의 염원을 손자인 당신이 실현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당신 부친의 외국어 실력은 대단했소.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로 자유로이 회화했소. 다른 과목들보다 외국어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소. 그가 통치 50년 기간에, 단 한 번 학교에 나가 수업 참관을 했는데, 바로 그것이 러시아어 수업이었고 그 진행자가 사범대학 교수였던 나였소. 거기서 그는 외국어 교육에서는 회화를 기본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강령적 교시도 남겼소.

나는 여기 미국에 와서 수많은 대학에서 북조선 교육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소. 5년 전부터는 버지니아에 ‘조선반도 언어연구소’를 세우고 일을 벌이기 시작했소.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이 부족하여 야단이오. 평양에 있는 재능 있는 동료 교수들, 실력 있는 제자들 생각이 간절하오. 그들이 자유로이 오갈 수 있어서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평양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사람, 외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오가며 과학기술, 교육문화를 자유로이 공동으로 연구 발전시킬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오.
▼ “내 품에서 엉엉 울던, 그때로 돌아가길 바랐는데…” ▼

김 위원장, 기억에 생생히 떠오르오. 당신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까, 50년 전이라고 생각되오. 당신 부친이 나를 시켜 당신에게 러시아어 회화 개별지도를 하게 하였소. 반년 동안이나 우리는 매일 오후, 당신이 다니던 남산학교 교장실에서 회화공부를 열심히 했지요.

그리고 1960년 2월, 눈보라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겨울 저녁이었소. 전국 러시아어 교원 협의회 참가자들을 위한 예술 공연에서 당신은 푸시킨의 시 ‘겨울 길’을 러시아어로 정말 멋지게 읊었소. 그날 저녁 날씨에 너무도 꼭 맞는 시였소. 당신의 시 낭송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모두가 일어서서 “김유라(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이름)” “김유라”라고 강당이 떠나갈 듯 환호하였소. 그러자 당신은 시 낭송을 지도했던 나한테 와락 달려와서, 내 품에 꼭 안겨 엉엉 울었소. 어린애처럼…. 나도 함께 울었소. 너무도 미덥고 감격스러워서….

그때의 그렇게도 순진했던 어린 학생으로, 미더운 제자로 제발 되돌아가 주기를 바라오.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전쟁 범죄자로, 독재자로, 당장 쳐 죽일 놈이라 규탄하고 있지만, 80세 된 나의 가슴에는 그때의 그렇게도 밝고 순진했던 미더운 제자 김유라만이 새겨져 있소. 김 위원장, 되돌아오길 바라오. 제발 그때의 그렇게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제자의 모습으로, 이 스승 앞에 돌아오길 바라오.

―평양에서 수천수만 리 떨어진, 미국, 버지니아, 조지메이슨대학 연구실에서
옛 스승 김현식
2011년 12월 18일 밤 10시(한국 시간 19일 정오)

PS. 편지를 막 끝내려 하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 와서 받아보니, 당신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하오. 내 귀를 의심했소. 나이 예순아홉에 어찌 이런 일이? 당신이 그렇게 되기까지 그 숱한 장수연구소 일꾼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이오. 당신이 더 늙기 전에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조국과 민족 앞에 못다 한 일을 하도록 편지까지 쓰고 있는데…. 김 위원장, 고이, 깊이 잠드시오. 당신이 저지른 잘못이 다음 대에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25일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김현식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갑자기 죽은 것은 후세인이나 카다피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 페어팩스=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25일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김현식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갑자기 죽은 것은 후세인이나 카다피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 페어팩스=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 ‘김정일 前가정교사’ 김현식 교수 인터뷰

“北이 집단지도체제? 장성택이 김정은 다 커버해줄 거야”

국립 러시아사범대 교환교수로 재직하던 1992년 러시아에서 망명한 김현식 교수는 월남한 후에도 북한 정권의 핵심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의 안전을 우려해 공개석상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것을 거부해왔다. 그는 2003년 도미해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김일성이 나보고 ‘여보, 우리는 60이 청춘이고 90이 환갑이야. 내가 이제 80즈음이니 아직도 환갑이지. 10년은 더 일할 수 있어’라고 말한 게 생생하다. (그렇게 따지면) 김정일은 지금 ‘청춘’이지, 이렇게 일찍 갈 줄 몰랐다. 북한 수재들이 다 모여 있는 ‘장수연구소’가 있는데 거기선 담당 의사들이 24시간 김정일에게 붙어있다. 장수연구소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 69세가 뭔가. 아버지만큼도 못 살고. 내가 쓴 책을 읽고 김정일이 마음을 돌려서 북한을 개방했으면 했는데, 김정일 스스로 ‘카다피처럼 죽으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마음을 돌리도록 하고 싶었는데…”

―가정교사를 할 때 김정일은 어떤 학생이었나.

“김정일이 고3 때였다.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됐는데 김일성이 전문가 몇 사람을 불러 ‘우리 애가 여름방학 한 달 반 동안 휴양소에서 러시아어 회화를 열심히 했는데 한 학기도 안 돼 다 까먹었다. 매일 한 시간씩 수업한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니 나가서 검열하시오’라고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검열위원장이 돼 김정일 수업 참관도 하고 교장실에서 교장 교원이 모여 시험도 쳤다. 읽기는 더듬더듬했지만 문법은 꽤 잘했다. 하지만 회화는 꽉 막혀 있었다. 김일성이 ‘아들한테 회화 과외 지도를 해라’라고 해서 매일 교장실에 앉혀놓고 회화 공부를 시켰다. 성실하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과외 끝나고 헤어질 때는 문간으로 따라와서 소련제 판 초콜릿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줄 정도였다. 중국제 담배도 줬다. ‘야, 난 담배 안 피워’ 그러니까 다음엔 중국제 알사탕을 넣어줬다. 매번 그랬다….”

김 교수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 어릴 때 순진하던 김정일을 생각하면서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이가 왜 저렇게 마음이 비뚤어졌는지….”

―김정일이 왜 호전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보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심리적으로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고 본다. 어렸을 때 동생이랑 못가에 가서 놀다가 동생이 빠져 죽었다. 그래서 혼자가 됐다. 또 일곱 살 때인가, 여덟 살 때 엄마(김정숙)도 자궁외 임신으로 죽고…. 북한에는 이(異)부모학원이라는 곳이 있다.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친부모가 아닌 애들을 기숙학교에 넣는 것인데 김일성이 만든 거다. 아들이 얼마나 비뚤어졌으면 아버지가 저런 새로운 학교 시스템을 만들었을까 생각할 정도다. 다음에 동생들이 생겼는데 평일, 경일, 경진이가 모두 자기보다 키가 크고 잘났다. 평일이는 학교 가서 애들 몽땅 끌어 다니면서 노는데 키 작은 김정일은 그렇게도 못하니까 더욱 열등감을 가진 것이다.”

―김정은으로의 권력세습은 순조롭게 될 거라고 보는가.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 있다. 10조 65항으로 돼 있는데 이게 북한의 헌법이다. 여기에 ‘혁명의 위업은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한다’는 대목이 있다. 북한에서 수령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다. 수령에게 충성을 다할 뿐이지 누구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김정일 다음에 그 아들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극렬이나 장성택이 어떻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집단지도체제? 북한 물정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정은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할 거다. 뒤에서 다 의견 나누고 장성택이 마지막에 김정은한테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좋지요’ 하면서 올릴 거라는 말이다. 또 군부에서 어떻게 한다? 그것 역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장성택이 김정은을 다 커버해줄 거다. 내가 1975년부터 장성택과 일했는데 통이 크고 미래지향적이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걸 김정은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면서 김정은이 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김정일이 죽었다고 해서 북한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 모르고 하는 소리다.”

―통일이 앞당겨질 가능성은 없나.

“북한 입장에선 제일 약한 게 식량 문제다. 의식주 문제가 딱 걸려 있는데, 이걸 풀려면 장성택이 통 크게 앞을 많이 내다보고 유연하게 해야 된다. 김정일보다는 외국에서 공부도 했고 다른 나라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장성택이 김정은을 개방의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본다. 김정일도 개혁 개방 하려고 했는데 체제를 유지하면서 핵개발도 놓지 않고 개방을 하려고 하니 이게 딜레마였다. 김정은도 개성공단을 절대 포기 못할 거다. 지금 자본주의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엄청 배우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북한식의 개방정책을 펼칠 거다.”

―김정일 사망 직전에 미국과 북한이 식량지원과 농축우라늄 폐기 문제에 의견 접근을 본 것 같은데….

“북한이 핵을 절대 버리지 않을 거다. 마지막 생명줄이 핵인데 포기할 리가 없다. 전술적으로 요렇게 갔다 조렇게 갔다 할 수는 있지만 본심은 핵을 죽을 때까지 꼭 안고 있을 거다.”
■ 김현식 교수는

김정일에 러시아어 가르쳐… 1992년 南으로

탈북학자 김현식 교수는 1971년부터 20년 동안 김일성 처가 쪽 자녀들의 개인 과외교사로 활동했다. 김일성 처남의 6세짜리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의 관심을 끌려고 김일성이 보는 앞에서 아이에게 목말을 태우고 숫자와 글자를 가르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로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김 위원장이 고 3때 러시아어를 개인교습하면서 친해졌다. 6개월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러시아어 개인교습을 했다고 한다.

1954년부터 38년 동안 평양사범대(김형직 사대) 러시아어과 교수로 일했다. 북한에서 2명만 파견되는 국립 러시아사범대 교환교수로 있던 1992년 대학에서 ‘북한 말과 한국의 얼’을 가르치다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주선으로 러시아에서 42년 전 함흥에서 헤어진 누나를 만나 남한으로 망명했다. 이후 10년간 탈북자로 서울에 머물며 경남대 북한대학원 초빙교수와 외국어대 교육대학원 러시아어 강사, 통일정책연구소(이사장 황장엽) 연구위원을 지냈다. 2003년 미국으로 건너와 예일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하버드대 등 40여 미국 대학에서 북한 교육을 주제로 강의했다. 2007년부터 버지니아 주 조지메이슨대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2007년 자서전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김영사)을 출판했다.

페어팩스=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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