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만화]<1>‘낢이 사는 이야기’의 서나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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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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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요? 예술요? 전 그냥 엔터테이너예요”

《인터넷과 모바일 콘텐츠 시장을 기반으로 탄탄한 세력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신진 만화가들을 ‘千變漫畵’ 시리즈에서 만나봅니다. 20, 30대가 주축인 작가들은 인터넷 연재뿐 아니라 일본 코믹스 위주였던 오프라인 만화책 시장에서도 한국 작품이 나름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주축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블로그 간판에 자칭 ‘웹툰요정’이라고 밝힌 서나래 씨는 얼굴 공개를 꺼렸다. “죄송합니다. 제삶의 얘기를 만화에서 보여주는 ‘낢’ 캐릭터가 만화가로서의 제 얼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인터넷 블로그 간판에 자칭 ‘웹툰요정’이라고 밝힌 서나래 씨는 얼굴 공개를 꺼렸다. “죄송합니다. 제삶의 얘기를 만화에서 보여주는 ‘낢’ 캐릭터가 만화가로서의 제 얼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8일 토요일 오후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앞에 500여 명이 칼바람을 맞으며 줄을 섰다. 웹툰 작가 서나래 씨(28)의 단행본 3권 출간 기념 사인회. 서 씨는 인터넷 웹사이트에 ‘낢이 사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생활코믹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행사는 예정보다 1시간 남짓 연장됐지만 기다렸던 이들 중 100여 명은 작가를 만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교보문고 홍보팀 진영균 과장은 “웬만한 소설가에 뒤지지 않는 호응”이라고 했다. 7년 전 개인 미니홈피에 재미 삼아 만화를 올리기 시작해 5권의 책을 냈을 뿐인 만화가가 차가운 주말 서울 종로 한복판에 수백 명의 팬을 한 시간 이상 줄 세운 것이다.

11일 오후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서 씨는 “사람 뜸해서 혼자 심심하게 앉아 있을까 봐 읽을 책도 가져갔는데…. 너무 많이 오셔서 깜짝 놀랐다. 정말 추웠는데,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사인하면서 속으로 계속 ‘우와, 왜 이렇게 많이 오셨지?’ 생각했어요. 물론 제가 여기저기 많이 알리긴 했지만요. 헤헤…. 스타요? 으으, 전혀요. 예술요? 으아, 아니요. 그냥 엔터테이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 그렇다고 연예인과 비교하면 얘기가 너무 ‘광대’해지는 거고요. 크크.”

‘낢이 사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서 씨의 일상 경험담을 코믹하게 재구성한 만화다. 대학 때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 ‘낢’. 만화의 내용은 얼핏 보면 별것 없다. 광주 송정역에서 부산 부전역까지 기차여행을 하며 ‘사투리의 변화’를 관찰한 부모의 경험담을 전하거나, 문득 일상이 허망하게 느껴져 늦깎이로 배운 바이올린 연주회에서의 실수연발 사연을 담기도 했다. 결말은 거창한 의미부여 없이 “풍경 실컷 봐서 좋았다”는 식의 평범하고 짤막한 단상으로 맺는다.

하지만 유머의 뒷맛이 허무하지 않고 늘 묘하게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웃기기 위해서 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가족과 친구에게서 찾아낸 ‘조금은 특별한’ 일화를 “얘, 어제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들려주듯 편안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짝사랑 경험을 담아 지난해 연재한 ‘낢에게 와요’도 술자리 친구의 소싯적 이야기처럼 흥미로우면서 애틋하게 읽힌다는 반응을 얻었다.

“동생이랑 자취하는 집에 오랜만에 오신 엄마가 최대한 많은 반찬거리를 만들어주고 가신 에피소드가 나가고 나서 ‘울 엄마도 그러신데, 많이 생각난다’는 e메일을 받았어요. 그럴 때 뭉클하고 보람 있죠. 사생활을 소재로 삼는다고 주변에서 항의하지 않느냐고요? ‘그 일 벌어질 때 나도 있었는데 왜 난 안 그렸어’라는 얘기는 가끔 들어요. 크크.”

그림은 단순한 선에 톤을 살짝 가라앉힌 색을 은은하게 입혔다. 여백을 넉넉히 둬 답답하지 않다. 서 씨는 “그림 실력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소박한 이야기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그 조화의 매력이 만만찮다.

“생활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했던 공부와 다르더라고요. 만화에도 몇 번 그렸는데 ‘자체휴강’이 다반사였죠. 헤헤. 그림 그리기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도 정식으로 배운 건 초등학교 때 두 달 학원 다닌 게 전부예요. 아무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요즘 드로잉 개인지도를 받고 있어요.”

외국어고를 갈 만큼 공부도 그럭저럭 잘했다. 번듯한 대학을 졸업한 딸이 만화가를 하겠다 선언했을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을까.

“중고교 때 한창 애니메이션에 빠져도 막지는 않으셨어요. 그때 어떤 친구는 ‘엄마가 만화책 다 찢어버렸다’고 울었는데…. 포기하셨던 건지 믿으셨던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크크. 애니메이션 보면서 ‘우와 나도 만들고 싶어’ 생각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직업에 대해 고민하진 않았어요. 중학교 때는 외계인이 되고 싶어 한 적도 있고…. 헤헤.”

서 씨의 만화 작업에는 놀이와 일의 경계가 모호하다. 대중음악 작곡가와 만나서 우스개 삼아 건넨 글에 곡이 붙여지자 직접 노래를 불러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좋아서 취미로 야금야금 벌인 놀이가 업(業)으로 굳어진 행복한 경우. 하지만 슬럼프는 바로 그 과정에서 찾아왔다.

“졸업하고 작업실을 내서 혼자 살았어요. 정말 이걸로 먹고살 수 있을까 불안해서 여기저기 급하게 일을 받았죠. 가족, 학교와 모두 멀어지니까 소재는 줄고…. 스트레스 때문에 야식만 늘어서 10kg 정도 쪘어요. 우울했죠. 길면 사흘씩 사람을 안 만났으니까.”

‘낢이 사는 이야기’ 시즌1을 끝내고 2009년 4월에 다녀온 네팔 여행을 통해 전환점을 찾았다. 부모와 다시 살면서 “고양이가 아닌 인간과 대화하는 시간의 중요성”도 새삼 깨달았다. 50개를 쟁여 놓았던 시즌2 예비 소재에서 이제 남은 것은 30개 정도. 서 씨는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과 만날 길을 찾는다.

“올해 안에 스마트폰 앱 서비스를 시작할 거예요. 보다 빨리, 사적인 소통을 할 수 있겠죠. 캐릭터 상품도 기존 스티커와 메모지에 노트를 더할 거고…. 더 먼 목표요? 흐흐, 글쎄요. 사인회에서 어떤 대학생이 중학교 때부터 봤다고 하는데, 기분 참 좋더라고요. 데뷔 10년 때 오프라인 전시를 열어서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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