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북한에서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10일 숨을 거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이날 행사에서 북한은 3대 세습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을 주석단(귀빈석)에 올려 그가 공식 후계자임을 대내외에 생중계로 알렸다. 바로 이날 망명 이후 13년간 북한의 세습 독재의 실상을 강하게 비판해온 황 전 비서가 눈을 감은 것이다.
황 전 비서는 탈북 후인 1999년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발간한 회고록 ‘김정일에 대한 선전포고’에서 김정일의 통치술과 전쟁관, 북한의 전쟁 준비 상황 등을 비판했다. 또 같은 해 한국에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해 북한의 주체사상이 봉건사상으로 변질된 과정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해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 부자는 독일 제3제국(1934∼1945)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처럼 주민들을 완전히 복속시켰다”고 말하는 등 망명 초기 황 전 비서의 북한 비판 발언은 거침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2000년부터 ‘남북 공조’에 비판적인 황 전 비서의 공개 활동 자유가 제약되기 시작했다. 그는 “당국이 생각을 밝힐 기회를 주지 않고 미국 방문도 가로막는다”고 주장했다.
황 전 비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10월 국가정보원이 “미국 방문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특별보호 대상에서 제외해 관광비자로 미국을 찾았다. 그는 미국에서 강연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핵무기 포기를 대가로 김정일 정권의 독재체제 유지를 보장하는 것은 북한 주민의 인권을 희생시키면서 독재자와 흥정하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중국식 개혁정책을 따르도록 설득할 수 있다면 무력 사용 없이도 북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6년 다시 미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노무현 정부는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2004년 8월에는 한 해외 유명 방송사 기자가 취재 약속을 하고 그를 방문했다가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정보요원들의 제지를 받은 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황 전 비서에게 해외여행과 집필, 강연 등의 자유를 배려하기로 했다. 이후 황 전 비서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부정기적으로 안보강연을 하고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의 ‘민주주의 강좌’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등 공개 활동을 재개했다. 지난해에는 동아일보를 방문해 기자들에게 강연했으며 “민간 비정부기구(NGO)와 탈북자들을 통한 북한 민주화 운동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부터 국내 탈북자단체 300여 개를 자신이 위원장인 북한민주화위원회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동아일보 강연에서 “비정부기구가 나서면 (북한 민주화) 비용이 절약되고 효과적이고 도덕적이다. 미국이 파키스탄과 이라크전쟁 등에 1800만 달러를 썼다는데 내게 900만 달러만 줘도 북한 민주화에 성공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3, 4월 미국과 일본을 방문했으며 미국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열린 강연에서 김정은에 대해 “그깟 녀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말했다.
황 전 비서는 수령 절대주의 사상으로 왜곡되기 이전 자신이 체계화한 주체사상에 애착을 보이며 이를 ‘인간중심철학’이라고 명명했고 ‘민주주의 정치철학’(2005년) ‘변증법적 전략전술론’(2006년) ‘인간중심철학원론’(2008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2009년) ‘논리학’(2010년) 등 최근까지 20여 권의 서적을 펴냈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이 북한 독재체제를 연장시키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오히려 악화시켰다며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도 남한 내의 친북 사조를 지적했다. 그는 남한 내부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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