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3>민족혼을 고취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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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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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첫 사업이 ‘단군영정 공모’… 민족혼 깨워 일제에 저항

동아일보 1931년 8월 30일자 ‘백두산행’에 실린 백두산 기슭 삼지연 호수의 풍광을 찍은 사진 및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31년 8월 30일자 ‘백두산행’에 실린 백두산 기슭 삼지연 호수의 풍광을 찍은 사진 및 관련 기사.
동아일보 창간호인 1920년 4월 1일자 3면에 창간 축하 만평이 실렸다. 동아일보를 상징하는 아기가 손을 뻗어 벽에 걸린 ‘단군유지(檀君遺趾)’를 잡으려는 모습이다. 단군의 유훈을 언론에 담아 조선 민중에게 알린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열흘 뒤인 4월 11일에는 사고(社告)를 내고 단군 영정을 독자들에게 현상 공모했다.

“우리는 앙모(仰慕)와 존숭(尊崇)의 충심으로 단군 존상(尊像)을 구하여 독자와 함께 배(拜)하려고 현상(懸賞)으로 존상을 모집하오니 강호형제의 많은 응모 바라나이다.”

창간 후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을 공모한 것은 일제 식민 당국이 강압적으로 흔들어 댄 민족의 구심점을 바로잡으려는 취지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때부터 단군을 부각한 것을 비롯해 한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말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일제에 맞서 민족혼과 정체성을 고취하는 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보도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는 우회적 항일투쟁 수단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특히 단군의 유훈을 지키는 데 공을 들였다. 조선총독부가 1926년 2월 산하 기관지에 단군을 비하하는 글을 싣자 동아일보는 2월 11, 12일 이틀에 걸쳐 사설을 통해 “이 논문의 이면에는 단군을 조선의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일제의 조선정신말살 음모가 숨어 있다”고 통박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의 관리비용을 충당하는 논밭이 빚 때문에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음을 상세히 보도한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의 관리비용을 충당하는 논밭이 빚 때문에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음을 상세히 보도한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충무공 이순신 유적보존운동을 주도한 것도 민족혼 고취의 하나였다. 빚 때문에 충무공 묘소의 위토(位土·묘소 관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된 토지)가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하자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13일자에 자세한 경위를 보도했다. 이광수는 1931년 5월 21일∼6월 10일 현지 사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실었고, 6월 26일부터는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동아일보는 성금 모금도 주도했다.

1932년 6월 5일 새로 건립된 현충사에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던 날, 3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한민족이 일제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다. 현충사는 현재 홈페이지의 주요 연혁에도 ‘1932년 6월 5일 현충사 중건, 영정봉안-이충무공 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성금 모금’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는 또 김정호 을지문덕 권율 등 한국사의 큰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다. 동아일보는 민족혼을 고양하는 크고 작은 행사를 가리지 않고 지면을 통해 확산시켰다. 1920년 7월 일본에서 공부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한반도 전역을 돌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강연회를 시작하자 동아일보는 이 활동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강연단이 7월 18일 서울에 도착했을 때 단성사에는 3000여 명이 운집했다. 하지만 경찰은 ‘불온한 언사로 치안을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대회를 1시간 만에 중단시켰고, 강연단은 강제 해산됐다. 이를 비난한 사설을 실은 7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발매금지됐다.

무궁화 바탕에 한반도 지도를 새겨 넣은 동아일보의 옛 제호. 동아일보 자료 사진
무궁화 바탕에 한반도 지도를 새겨 넣은 동아일보의 옛 제호.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는 소설을 통해서도 민족혼을 고취했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던 현진건은 1938년 7월 20일부터 역사소설 ‘무영탑’을 연재했다. 신라시대 불국사 석가탑 건립을 중심으로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것이지만 그 의미는 남녀의 사랑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근대소설사연구’에서 “‘무영탑’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다름 아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다.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던 현진건이었던 만큼 그의 내면의식에는 이 민족주의적 의식이 잠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동아일보가 1921년 8월 21일부터 연재한 기행문 ‘백두산행’은 민족의 웅혼이 깃든 백두산을 부각함으로써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드높였으며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통해서도 민족혼을 고취했다. 1925년 10월 21일자에선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해 독립의식을 북돋웠다.

“무궁화는…, 아침에 이슬을 먹으며 피었다가 저녁에 죽어 버리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죽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자꾸 무성하는 것이, 찰나를 자랑하였다가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쿠라’보다도, 붉은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 끈기 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고….”

동아일보를 상징하는 아기가 손을 뻗어 벽에 걸린 ‘단군유지(檀君遺趾)’를 잡으려는 모습을 그린 동아일보 창간호 축하 만평.
동아일보를 상징하는 아기가 손을 뻗어 벽에 걸린 ‘단군유지(檀君遺趾)’를 잡으려는 모습을 그린 동아일보 창간호 축하 만평.
1930년 1월 1일 신년호부터는 ‘동아일보’ 제호 바탕에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지도를 새겨 넣었다. 이런 동아일보를 바라보는 총독부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이연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가 쓴 ‘조선언론통제사’에 따르면 총독부는 제호의 배경인 한반도와 무궁화 도안을 빼도록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극심한 언론 탄압으로 정상적인 신문 발행이 불가능해지면서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은 1938년 2월 10일자부터 제호에서 빠졌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파일럿 안창남 초청 ‘독립염원 비행’ ▼

본사 주최 행사에 5만 운집… 청년들에 희망과 용기 심어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1922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 주최로 서울 상공을 선회 비행한 21세의 청년 파일럿 안창남(1901∼1930). 행사 한 달 뒤 그는 당시의 심경을 회상했다. 고국 하늘을 비행한다는 자랑스러움보다 수난당하는 동포에 대한 안타까움이 청년 영웅의 마음속에 더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안창남 고국비행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6800원을 지출했지만 수입은 600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망설이지 않고 6200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일제의 압제로 열패감에 빠져 있던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줄 거족적 행사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행 한 달 전 동아일보 사설도 “안창남군의 1회 비행이 직접으로 오인(우리)의 모든 생활을 개혁 발전한다는 것은 아니나 간접으로 자중자신할 기회를 작(作)할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 하노니(…) 조선인도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하는 것은 실지적 교훈으로 오인의 두뇌에 인각(印刻)할 것 아닌가”라고 행사의 취지를 밝혔다.

1922년 12월 귀국한 안창남(원내)이 경부선 특급열차편으로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고 있다.
1922년 12월 귀국한 안창남(원내)이 경부선 특급열차편으로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고 있다.
안창남은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비행학교에 입학해 3개월 만에 비행사 면허를 딴 준재였다. 2년 뒤에는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을 차지해 무시험으로 1등 비행사 면허를 따면서 일본을 놀라게 했다.

서울 상공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10월 29일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했다. 12월 5일 환영 인파에 파묻혀 경성역에 도착한 안창남은 10일 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했다. 그의 비행을 보려는 시민들이 서울의 대로 곳곳을 가득 메웠다. 하늘에서 그는 안창남, 동아일보,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후원회 명의의 성명서를 흩뿌렸다. “이 문명의 진운(進運), 이기(利器)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이후 안창남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문맹타파 ‘브나로드’ 운동 불붙여 ▼
규모 커지자 총독부 중지령… 농촌계몽 거센 열기 못 막아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농민 계몽운동을 가리키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운동은 한국에서 야학운동, 농촌계몽운동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브나로드운동에도 앞장섰다.

1928년 3월 16일 동아일보는 문맹타파운동 ‘글 장님 없애기’를 공표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90%가 문맹이었는데, 이는 민족 발전에 적지 않은 장애라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간 8주년 기념일을 기해 본사와 전국의 지국을 총동원해 포스터를 내걸고 안재홍, 방정환, 최현배, 최남선 등 명사 30여 명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 계획을 안내했다.

1931년부터 4년간 동아일보가 주관한 브나로드운동의 포스터.
1931년부터 4년간 동아일보가 주관한 브나로드운동의 포스터.
조선 총독부는 불과 행사 사흘 전에 문맹타파운동 중지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 운동의 규모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민족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에 놀랐기 때문이다. 문맹타파운동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도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는 동아일보가 주도했던 문맹타파운동이 1930년대 전반 전국을 휩쓴 브나로드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 7월 16일 ‘제1회 학생 하기(夏期) 브나로드운동-남녀학생 총동원, 휴가는 봉사적으로’라는 기사를 통해 브나로드운동을 재점화했다. 운동의 핵심은 문맹퇴치와 한글보급이었다. 첫해에는 62일 동안 학생계몽대 423명이 전국 127곳을 돌며 한글 강습과 학술 강연을 펼쳤다. 동아일보는 ‘한글 공부’ ‘한글맞춤법통일안’ ‘신철자편람’ 등의 교재를 제공했다. 동아일보가 주도한 계몽운동의 열기는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당대 문학작품에도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심훈의 ‘상록수’(1935년) 이광수의 ‘흙’(1932년) 등 두 작품은 모두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됐다. 심훈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장편공모에 당선된 그의 대표작 ‘상록수’에서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젊은 남녀의 애정을 그려냈다.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연재했던 ‘흙’을 통해 ‘농민의 속으로 가자’는 계몽운동의 기치를 설파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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