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2>항일 투쟁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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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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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검열 맞서 항일투쟁 보도 앞장… ‘今日大公判’ 편집 압권

나석주 폭탄의거 호외 압수되자 더 자세히 담은 ‘호외의 호외’ 배포
윤봉길의사 의거도 최초로 알려 독립의지-민족의식 고취 선도

3·1운동에 참여한 민족지도자 48인의 공판을 안내한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1면. 조선총독부의 언론 검열에 개의치 않고 48인의 얼굴사진으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작은
사진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폭탄투척 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동아일보 자료 사진
3·1운동에 참여한 민족지도자 48인의 공판을 안내한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1면. 조선총독부의 언론 검열에 개의치 않고 48인의 얼굴사진으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작은 사진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폭탄투척 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0년 7월 12일 서울 정동 특별법정에서는 대대적인 재판이 시작됐다. 피고는 민족대표 48인.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인쇄 배포하는 데 적극 참여한 이들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3·1운동 직후 해외에 망명해 체포되지 않은 김병조와 구금 중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한 31인, 여기에 박인호 등 17인이 포함됐다. 정동의 공판정 입구는 새벽부터 방청객들로 붐볐다.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는 1, 2, 3면에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금일(今日)이 대(大)공판’. 1면은 48인의 얼굴사진으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조선총독부의 언론 검열을 전혀 개의치 않는 과감한 보도였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920년 7월 13일 3면과 14일 3면에도 ‘조선독립운동의 일대사극(一大史劇), 만인의 주목할 제1막이 개(開)하다’ 등의 공판 기사를 이어갔다. 15일에도 3면 전면, 16일에는 2, 3면 전면을 통틀어 피고인들의 답변 속기록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 후에도 재판과정을 지속적으로 소개했다.

동아일보는 이 같은 보도를 통해 3·1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의 당위성과 항일의지를 북돋웠다.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사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잇달아 폭탄을 투척했다. 일제는 즉각 보도금지 조치를 내렸다. 보름 뒤인 1927년 1월 13일 보도금지가 해제되자 동아일보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호외를 냈다. ‘백주 돌발한 근래초유의 대사건’, ‘위선 식산에 일탄(一彈)!’.

일제 경찰은 허락받지 않은 내용이 담겼다며 이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를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월 14일 다시 ‘호외의 호외’를 냈다. 의거를 더 상세히 보도하고 일제의 보도통제를 고발했다. ‘라석주 사건에 대하야 작일(昨日) 호외를 발행하엿스나 여러 차례나 당국의 삭제를 당하고 다시 호외를 발행하야 시내에 배포하엿스며 지방에는 금일 본지와 함께 배송하엿삽.’

탄압이 심해질수록 필봉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 폭탄투척 의거가 일어났다. 그날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충의사 홈페이지는 “동아일보가 재빨리 호외로 윤 의사의 의거를 최초로 알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호외를 한 번 더 발행해 의거의 주인공이 조선 청년 윤봉길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다음 날인 30일엔 이를 종합한 속보형 호외까지 냈다. 윤 의사 쾌거를 알리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호외를 발행한 것이다.

1920년 4월 강우규 의사의 공판 보도, 1922년 3월 김익상 의사의 공판상황 현장중계 보도,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 의거 호외 보도 등 동아일보의 독립운동 관련 보도는 쉼 없이 이어졌다.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도 통제가 극심했던 상황에서 연이은 대서특필로 민족정신을 고취한 것이다. 1920년 11월엔 동아일보의 장덕준 기자가 만주 훈춘에서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고 교민들을 대량 학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단신으로 건너가 이를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게 희생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이 같은 보도에 대해 한시준 단국대 교수(독립운동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곳곳에서 항일투쟁이 일어났다. 그 투쟁은 널리 알려져야 했다. 그래야 힘을 얻고 많은 사람들의 독립의지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항일투쟁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민족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독립해야 한다는 민족의식. 그 역할을 동아일보가 한 것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를 호외 보도한 것을 예로 들면, 총독부의 언론통제가 극심하던 상황에서 호외를 발행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 기사를 보도했다는 것 자체가 치열한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을 향한 동아일보의 열망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지난해 세계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동일한 처지에 처한 우리로서 이를 회고하여 보는 것도 또한 도로(徒勞)는 아닐 줄로 안다.”

1926년 1월 1일, 동아일보는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투쟁 신년특집 기획 시리즈 ‘을축년간(乙丑年間) 약소민족운동 운강(雲岡)’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어 1929년과 1934년에도 세계 약소민족의 저항과 독립 투쟁을 신년특집 시리즈로 보도했다.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독립투쟁을 한국인에게 각인시켜 독립의식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1920년 4월 중국의 배일(排日) 항쟁 기사 등 1920년대 내내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을 소개했다.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신음하던 인도의 독립투쟁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1920년 7월 2일자 1면 사설 ‘인도에 민족자결주의 적용 결의’에선 ‘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의 자유의사에 의해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지지했다.

동아일보의 이 같은 보도는 민족정론지로서 항일투쟁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수행한 것이다.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운동사 8권-문화투쟁사’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동아일보의 의도하는 바는 이를 통해 오늘을 개탄하고 내일을 기약하면서 나라 잃은 민족의 구심점을 찾는 데 앞장서는 것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동병상련’ 인도의 격려 ▼

간 디 “무저항적 수단으로 조선 독립 이루길”
타고르 “아시아의 등불… 동방의 밝은빛 되리”



1926년 11월 26일 인도 사바르마티의 아슈람(ashram·수행자 공동주거지)에서 ‘코리아의 서울’로 날아온 영문 편지다. 발신인은 모한다스 K 간디, 수신인은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동아일보는 1927년 1월 5일자 2면 톱기사에 ‘간듸 씨의 멧세지’를 얼굴과 편지봉투 사진, 경력 요약문, 영어 원문과 함께 실었다. 이 편지는 1926년 10월 12일 인촌이 간디에게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사바르마티에 보관돼 있는 영문 편지에서 인촌은 “당신은 조선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다. 우리에게 당신은 이방인이 아니다.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는 조선을 위해 선지자(先知者)인 당신의 고언을 청한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지속적으로 영국 식민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온 인도와 그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 간디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방식으로 일제 식민 지배를 겪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독립 정신을 일깨웠다. 동아일보에서 인도의 독립을 위한 간디의 외침은 곧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목소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1929년 4월 1일자에는 “인도인 군중에게 영국제 면포(綿布)를 불살러버리라고 부르지진 마하도마 간듸 씨가 벌금 65전을 물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간디가 이끈 인도 독립투쟁과 영국의 탄압을 전한 동아일보의 기사들은 1920년 9월 25일 제1차 무기정간 사유 중 하나가 됐다.

1939년 11월 11일자 1면에는 ‘인도 독립을 위하여 최후까지 투쟁, 간디 옹 언명’이라는 기사를 간디의 사진과 함께 실었다. 석간 1판에 실렸던 이 기사는 검열로 인해 다음 판부터 사라졌다.

1929년 4월 2일자 2면에는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일본에서 만난 동아일보 도쿄지국장 이태로에게 건넨 시가 게재됐다. 동아일보는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일본에 잠시 들른 그를 서울로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자 했지만 타고르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다가 동행한 미국인을 통해 이 글을 전했다.

“일즉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비치(빛이) 되리라.”

1913년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詩聖)이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격려하기 위해 시를 써내려간 것이다. 영어 원문 번역은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낸 시인 주요한이 맡았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유적 보존… 학술활동 지원… 3·1정신 계승 발전 선포 ▼

동아일보의 지속적인 ‘선양 운동’
언론사론 첫 ‘3·1문화상’ 받기도


▲▲ 1927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간디의 편지. 그는 ‘조선을 위한 선지자(先知者)의 조언을 청한다’는 동아일보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편지를 받고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내왔다.▲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 “아시아의 등촉(燈燭), 조선의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 동방의 밝은 빛이되리라”는 내용으로 일제치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격려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1927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간디의 편지. 그는 ‘조선을 위한 선지자(先知者)의 조언을 청한다’는 동아일보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편지를 받고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내왔다.

▲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 “아시아의 등촉(燈燭), 조선의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 동방의 밝은 빛이되리라”는 내용으로 일제치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격려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본사에서는 전국적으로 3·1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3·1정신을 우리 민중의 가슴 속에 새겨두고자 합니다. 이 운동은 남녀노소, 전국의 모든 애국동포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1965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1965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45주년을 맞아 6대 사업 중 하나로 3·1유적보존운동을 펼친다고 선언했다. 당시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국론이 분열되던 시기. 전 국민이 한마음이 됐던 3·1운동의 정신을 새겨보자는 취지였다. 이 운동을 통해 전북 익산, 충북 영동, 강원 횡성 등 전국의 3·1운동 관련 지역에 3·1운동기념비가 건립됐다.

이후 동아일보의 3·1정신 선양사업은 1969년 3·1운동 50주년 기념 논문집 발간으로 이어졌다. 이 논문집은 논문 76편, 총 1086쪽이라는 방대한 규모로 이희승 김상기 오천석 김성균 신기석 등 국내 학자는 물론이고 해외 학자까지 참여했다. 1989년에는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 ‘3·1운동과 심포지엄’도 주최했다. 국내 학자는 물론 재일동포, 재중동포 사학자들이 참여하는 등 국제적 학술대회였다. 2000년대에는 2008년 기미독립선언서 재조명, 2009년 민족대표 48인 재조명 기획이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동아일보는 2008년 3·1문화재단이 3·1운동 정신을 고양한 단체나 개인에게 수여하는 3·1문화상 특별상을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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