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입적]“내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 위해 써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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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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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적 전날 ‘무소유’ 유언… 청빈과 수행의 삶

암자-산골 오두막서 지내며 세속과 거리 두고 수행-저술
1997년 도심도량 길상사 개원…金추기경과 종교 초월한 교유

‘무소유’란 책으로 대중의 물욕을 꾸짖은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삶을 실천으로 보였다. 2008년 3월 길상사로 찾아온 신도들을 위해 법정 스님이 저서에 친필 사인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길상사
‘무소유’란 책으로 대중의 물욕을 꾸짖은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삶을 실천으로 보였다. 2008년 3월 길상사로 찾아온 신도들을 위해 법정 스님이 저서에 친필 사인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길상사
《11일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은 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 ‘무소유’처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무소유로 돌아간 수행자였다.

“세상 떠들썩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또 사리를 줍는다고 재를 뒤적이는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 내가 입던 승복 그대로 입혀서, 내가 즐겨 눕던 작은 대나무 침상에 뉘어 그대로 화장해 달라. 나 죽은 다음에 시줏돈 걷어서 거창한 탑 같은 것 세우지 말고, 어떤 비본질적인 행위로도 죽은 뒤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법정 스님이 사석에서 평소 가까이 지내는 이에게 당부한 말이다.

청빈과 끊임없는 수행을 강조해 왔던 생시의 모습만큼이나 맑고 향기롭게 떠난 그의 앞에 세상은 깊이 고개 숙여 추모했다.》

가톨릭 신자로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을 조각했던 조각가 최종태 씨(김종영미술관 관장)는 1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글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맑은 정신의 향기를 던져주신 분이다. 스님의 말씀은 설명이 적고 깔끔하고 직관적이어서 더욱 무게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스님과 각별한 인연을 쌓았던 류시화 시인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강원도 눈 쌓인 산이 보고 싶다’고 했던 스님이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며 슬픔을 나타냈다.

법정 스님은 1954년 출가한 뒤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등 몇 차례 소임을 맡은 것을 빼면 명리와는 담을 쌓은 수행자의 본분을 지켜왔다. 1960년대 말 동국대 동국역경(譯經)원 편찬부장을 지내며 불경 번역에 참여한 뒤 1988년 ‘신역 화엄경’(이레) 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해 펴낸 ‘역경가’로서의 스님 역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면모다.

그는 1975년 중 노릇을 제대로 하겠다며 전남 순천시 송광사 뒤편에 있는 작은 암자 불일암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무소유’(1976년) ‘서 있는 사람들’(1978년) ‘물소리 바람소리’(1986년) 등 정갈하면서도 맑은 목소리를 담은 책들이 나왔다.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1992년에는 전기도 없는 강원 산골의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1960년대 봉은사 다래헌에서 생활할 무렵 스님은 중앙일간지로는 처음 동아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었다. 1993년 4월부터 1998년 11월까지는 매달 한 차례 칼럼 ‘산에는 꽃이 피네’를 연재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스님은 강원도에서 손수 3시간여씩 차를 몰고 와서 동아일보에 원고를 건네기도 했다.

2003년 ‘수행자이면서 왜 신문 칼럼과 글을 쓰냐’는 질문에 스님은 해인사 수행 시절의 일화로 답했다. “장경각 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내려오면서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내려오신 곳에 있다고 하자 할머니는 ‘아, 그 빨래판 같은 거요’라고 했습니다. …불교가 옛것만 답습하고 제도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팔만대장경 말씀도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스님은 1994년 시민운동 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설립한 뒤 1996년 요정이었던 서울 성북동 대원각을 시주 받아 이듬해 길상사를 개원했다. 스님이 일체의 직책을 멀리해 왔기에 ‘주지’라는 직함보다 ‘모임이나 법회를 이끄는 사람’이란 뜻의 회주(會主)라는 이름만 지녔다. 이후 길상사는 천주교, 개신교 등 타 종교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종교 화해와 나눔의 장이 됐다. 2009년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길상사를 찾는 등 각별한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스님은 종교가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추상같이 목소리를 높였고, 자신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무거운 죽비를 내리쳤다.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 쓰고, 선물을 쌌던 포장지에 글을 썼다. 길상사에도 자신의 거처를 두지 않았다. 법회에 참석한 뒤엔 바로 강원 산골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스님은 입적하기 몇 해 전부터 지병으로 건강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삶 역시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시간을 무가치한 것, 헛된 것, 무의미한 것에 쓰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모독이다. 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 써야겠다고 순간순간 마음먹게 된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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