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보도 교묘히 덮은 ‘동문서답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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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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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판사 정리한 ‘보도요지’
검찰 기소내용과 동떨어져

다우너 소와 광우병
‘병에 걸렸거나…’ 핵심 빼고
‘광우병 의심’으로 수위 낮춰

아레사 빈슨 사망원인
‘인간광우병’ 단정했는데
‘부검통해 조사중’ 얼버무려

한국인 광우병 취약성
‘발병확률 94%’ 못박았는데
‘유전적 취약’으로 포괄해석

정부 협상단 협상태도
‘광우병 위험성 은폐’ 빼고
‘소홀히 했다’로 요지 바꿔


법원이 20일 MBC PD수첩 제작진 5명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검찰이 ‘허위’라고 기소한 PD수첩의 보도와 다른 내용을 ‘보도요지’로 다시 설정한 뒤 “허위가 아니다”라고 판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은 21일 “재판부가 검사가 제기한 공소사실이 아닌 다른 내용을 재차 정리해 판단하는 바람에 공소제기 내용은 판단을 받을 기회조차 상실했다”며 “법원이 ‘동문서답(東問西答)’식 판결을 했다”고 비판했다. 법원이 언론 보도로 초래된 명예훼손 사건을 심리하면서 검찰이 허위라고 지목한 보도요지를 제쳐두고 다른 내용을 판단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①‘주저앉는 소(다우너 소)’=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문성관 판사는 판결문에서 다우너 소와 관련된 PD수첩의 보도요지를 ‘다우너 소들은 광우병 의심 소’라고 규정한 뒤 몇 가지 이유를 들어 PD수첩 보도내용이 허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검찰은 “‘다우너 소들은 광우병 의심 소’라는 대목은 검찰이 당초 기소한 내용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검찰이 다우너 소와 관련해 허위보도라고 지목한 요지는 “주저앉는 소들이 광우병에 걸렸거나 걸렸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인데 재판부가 ‘다우너 소들이 광우병에 걸렸다’는 대목을 빼면서 PD수첩이 보도한 다우너 소의 범위가 ‘광우병 의심 소’로 좁혀졌다는 것. 이는 정정보도 사건 판결을 내린 1, 2심 재판부가 PD수첩의 보도요지를 ‘동영상 속에 등장하는 주저앉는 소들은 광우병에 걸렸거나 걸렸을 확률이 높다’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판단 대상으로 삼아 ‘허위’라고 판결한 것과도 배치된다.

②아레사 빈슨 사인(死因)=문 판사는 아레사 빈슨의 사망원인과 관련해 “빈슨이 MRI 검사 결과 인간광우병 의심진단을 받고 사망했고, 현재 보건당국에서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요지라고 정리한 뒤에 이 부분이 허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반면 검찰은 “PD수첩의 보도의 취지는 ‘아레사 빈슨이 인간광우병에 걸려 사망했거나, 인간광우병에 걸려 사망했을 여지가 매우 크다’는 것인데 재판부가 사인을 단정한 내용을 빼고 보도요지를 정리했다”고 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검찰은 아레사 빈슨이 인간광우병으로 죽었을 여지가 매우 크다고 보도한 것이 허위라고 판단하고 기소했는데 법원은 사실관계를 다르게 정리해서 허위가 아니라고 했다”고 말했다.

③한국인의 유전자형과 인간광우병 발병 위험성=이 대목에서 법원과 검찰은 PD수첩의 보도요지를 완전히 달리 보고 있다. 법원은 “국내 정상인이 프리온 유전자의 코돈 129번 유전자형이 MM형이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 유전적으로 취약하다”는 내용을 보도요지라고 정리한 뒤 국내 연구논문과 농림수산식품부의 전문가 회의 자료 등을 근거로 “허위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반면 검찰은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섭취할 경우 인간광우병이 발병할 확률이 94%가량 된다”는 것을 허위보도 요지라며 기소했다. 검찰은 “한국인의 94%가량이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국민이 받아들이는 광우병 위험의 핵심적 내용인데 법원이 이 부분에 대해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고 반발하고 있다.

④정부의 협상 태도=검찰은 ‘정부와 협상단이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몰랐거나 알면서도 은폐하거나 축소한 채 수입협상을 체결했다’는 게 국민이 PD수첩을 시청하고 인식한 내용이라고 판단해 기소했다. 하지만 문 판사는 검찰의 공소사실에서 ‘은폐하거나 축소’라는 표현을 빼고 ‘정부가 소홀히 했다’는 것으로 PD수첩의 보도요지를 바꿨다. ‘정부가 광우병으로부터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미국의 소 도축 시스템 실태를 파악하는 데 소홀히 했다’라고 보도요지를 다시 정리한 것. 검찰 관계자는 “PD수첩의 보도요지에 대해 법원과 검찰의 시각이 다를 수 있다고 보지만 판사가 유무죄 판단의 대상을 바꾸는 중대한 사안을 처리하면서 판결문에 설명 한 줄 넣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중앙지검은 21일 서울중앙지법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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