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 그 후]<5> 北 임진강 방류 참사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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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빠졌잖아, 아빠…” 악몽에 빠진 아이스박스 소년

남편-아들 잃은 유가족 3명 현장 처음 찾아 오열
“아빠가 꿈에 고기 사줬어” 49재 날 딸의 말에 통곡


차에서 내리자마자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청주 석 잔에 절 두 번. 방향도 없이 모래톱 위에 북어 한 마리를 놓고 두 번째 절을 하던 부인들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이 하나, 가지 말라고 할 것을, 불쌍한 우리 남편, 불쌍한 우리 아들….”

“여보… 아들아…” 차마 절을 마치지 못하고…  9월 북한의 댐 방류로 6명의 희생자를 낳은 ‘임진강 참사’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유가족 3명이 13일 참사 현장인
경기 연천군 임진교 하류 모래섬을 찾았다. 왼쪽부터 이경화 한지연 김선미 씨. 이들은 북어 한 마리를 놓고 각기 청주 석 잔을
모래에 뿌린 뒤 절을 했다. 이들의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해 두 번째 절을 채 마치지 못했다. 연천=조종엽 기자
“여보… 아들아…” 차마 절을 마치지 못하고… 9월 북한의 댐 방류로 6명의 희생자를 낳은 ‘임진강 참사’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유가족 3명이 13일 참사 현장인 경기 연천군 임진교 하류 모래섬을 찾았다. 왼쪽부터 이경화 한지연 김선미 씨. 이들은 북어 한 마리를 놓고 각기 청주 석 잔을 모래에 뿌린 뒤 절을 했다. 이들의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해 두 번째 절을 채 마치지 못했다. 연천=조종엽 기자
김선미 씨(36)가 통곡했다. 한지연 씨(40)와 이경화 씨(38)도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13일 오후 경기 연천군 미산면 임진교 하류 2km 지점 모래섬. 97일 전인 9월 6일 오전 5시 반경 이곳에서 이경주 씨(38)와 아들 용택 군(9), 서강일(40) 백창현(39) 이두현 씨(40) 등 5명이 텐트를 치고 야영하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댐 방류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렸다. 하류 비룡대교 인근에서 낚시를 하던 김대근 씨(39)도 떠내려갔다. 수마는 이들을 사랑하는 가족과 갈라놓고 말았다.

용택 군의 어머니인 김 씨, 서 씨의 아내 한 씨, 백 씨의 아내 이 씨는 사고 뒤에도 현장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남편과 자식이 마지막 머물렀던 곳인데 한 번은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날 참사 현장을 처음으로 찾았다.

“겨우 이만큼인데, 이것을 못 건너다니….” 넓고 평화로운 모래섬에서 부인들이 가슴을 쳤다. 사고 당시에는 강둑까지 수십 m 거리에 거센 물살이 흘렀지만 지금은 물이 발목에도 차지 않을 정도로 얕고, 강물 폭도 좁은 곳은 7m 정도에 불과했다. 흐르는 눈물을 진정시킨 이들은 임진강물을 향해 “용택아, 한솔 아빠” “우택 아빠” “창현 씨”라고 짤막하게 고인들의 호칭을 불렀다. 사건이 난 지 100일이 다 돼 가지만 남은 가족들의 고통은 갈수록 심하다. 김 씨는 손님을 보고 웃을 자신이 없어 1년 가까이 하던 제과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남편들의 직장이던 택배회사 동료들이 자주 안부 전화를 걸어왔지만 이들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부인들끼리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고 자주 통화하며 서로를 달랬다.

서 씨 아들 우택 군(12)은 사고 뒤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당시 아버지 서 씨는 우택 군을 아이스박스에 태워 강가로 밀어내 살린 뒤 자신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우택 군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다. 우택 군은 “아빠가 엄마한테 나를 선물로 줬나보다”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다가도 갑자기 표정이 침울해지며 운다고 한다.

“강물은 말랐는데 눈물은 마르질 않아…”

아빠 보낸 열두살 아들 악몽에 피 나도록 발등 긁어
수자원公“사망자도 과실” 보상금 아직도 줄다리기


13일 임진강 참사 현장을 찾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희생자 부인 한지연 이경화 김선미 씨(왼쪽부터). 이들은
모래섬에서 뭍까지 10m도 안 되는 강폭을 보며 “원래는 이렇게 평온하고 안전한 곳이었는데”라며 가슴을 쳤다. 연천=조종엽 기자
13일 임진강 참사 현장을 찾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희생자 부인 한지연 이경화 김선미 씨(왼쪽부터). 이들은 모래섬에서 뭍까지 10m도 안 되는 강폭을 보며 “원래는 이렇게 평온하고 안전한 곳이었는데”라며 가슴을 쳤다. 연천=조종엽 기자
우택 군은 사고 뒤 한동안 피가 나도록 양 발등을 긁었다. 딱지가 떨어지기도 전에 긁어 다시 피가 나는 일이 반복됐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물이 빠졌잖아, 아빠…”라고 잠꼬대를 하다 깨는 일이 잦았고 싸우는 꿈도 자주 꿨다. 예고 없이 댐을 방류한 북한에,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던 데 대해 자주 화를 냈다. 의사는 “우택이에게 분노가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한 씨는 “치료를 시작한 한 달 전부터는 그래도 잠을 잘 자 다행”이라고 말했다. 우택 군의 여동생(9)은 “언제 아빠가 가장 보고 싶냐”는 심리 상담사의 질문에 “지금요”라고 답했다.

아홉 살 용택 군과 남편을 함께 잃은 김 씨는 “남편과 찍은 사진은 그대로 탁자 위에 놨는데 아들과 찍은 사진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마지막 일기장, 장난감, 태권도복 등 아들의 물건은 장롱 속 깊은 곳에 넣어 놨다. 김 씨는 “친지들은 버리라고 하지만 절대 버릴 수가 없다”며 “늙어 죽을 때까지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의 큰 딸인 한솔 양(12)은 아버지의 사십구재일 아침 “아빠가 어젯밤 꿈에 나와 맛있는 고기를 사주고 갔다”고 말해 김 씨의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 이경화 씨와 사망한 남편 백 씨는 고향이 충남 청양군 장평면으로 한동네 친구여서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백 씨는 2000년 추석 고향에 왔다가 오랜만에 만난 이 씨에게 “아직 결혼 안 했으면 나에게 시집오라”고 말했다. 둘은 그해 12월 결혼했다. 17일이 결혼 9주년. 지난해 전세금 7000만 원에 저축한 돈과 대출을 합해 1억5000만 원가량의 내 집을 마련한 상태였다. 다른 가족들도 형편은 비슷하다. 이 씨는 “사고 전날인 토요일 ‘잘 다녀올게’라며 떠났는데 그대로 이별이었다”며 “여기 있는 아내들은 아무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세간에는 유족들의 보상금 지급이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각기 1억 원가량의 가지급금만 받은 상태다. 유족들은 9월 10일 한국수자원공사 측과 장례일 7일 이후부터 3개월이 지나기 전 보상금과 특별위로금(보상금의 60%)을 받기로 합의했지만 이후 수공은 임진강은 야간 야영금지 구역으로 사망자에게도 과실이 있어 그 과실비율만큼 보상액에서 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사망자에 따라 4억여 원부터 9억여 원까지 총 36억여 원의 보상금 지급을 요구하는 조정신청을 냈고 16일 법원의 1차 조정을 앞두고 있다.

유족 대표 이용주 씨(48)는 “고인들은 수자원공사의 경보 시스템만 작동했더라도 살 수 있었다”며 “평생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야 하는 어머니의 처지를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연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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