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강제폐방 29년…DNA는 살아있다]<상>신문-방송 겸영의 모델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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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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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신문 특종-심층분석 활용해 차원다른 뉴스 방송

희망에 찬 개국… 눈물의 폐방
1963년 4월 25일 새롭고 격조 높은 방송을 내세우며 문을 연 동아방송의 개국 기념공연(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1980년 11월 30일 폐방된 다음 날 KBS로 떠나는 직원들과 남은 직원들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희망에 찬 개국… 눈물의 폐방 1963년 4월 25일 새롭고 격조 높은 방송을 내세우며 문을 연 동아방송의 개국 기념공연(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1980년 11월 30일 폐방된 다음 날 KBS로 떠나는 직원들과 남은 직원들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언론 통폐합이 가져온 비극이라면 동아방송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1960년대 초 국내에서 아직 방송의 언론적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세계적으로 드문 매우 언론적인 방송이었으며, 동아방송의 프로그램은 격조와 창의성이 넘쳐 있었다.” 언론학계의 원로인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1년 4월 18일 퇴임 강연 ‘체험적 한국 방송 40년’에서 동아방송을 이렇게 평가했다. 동아방송의 많은 프로그램은 이후 한국 방송의 모태가 됐다. ‘라디오 석간’ ‘DBS 리포트’ 등은 다양한 시사 프로그램으로 이어졌고, ‘정계야화’ ‘유쾌한 응접실’도 수많은 아류 드라마와 토크쇼를 낳아 디지털 방송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30일 동아방송 폐방 29년을 맞아 동아방송의 가치와 성과를 재조명하고, 동아방송이 21세기 멀티미디어 시대를 주도할 새로운 방송에 던지는 교훈을 3회에 걸쳐 진단한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방송 허가를 받은 동아방송은 1963년 4월 개국부터 1980년 11월 신군부에 의한 강제 폐방 직전까지 동아일보 DNA를 방송에 접목하면서 뚜렷한 차별화에 성공했다.

동아일보가 구현해온 저널리즘 가치를 방송 프로그램에 창의적으로 계승하면서 신문과 방송 겸영이 빚어내는 최적화된 시너지를 창출한 것이다. 개국 1년 만인 1964년 당시 공보부 조사에서 33.5%의 청취율로 전국 방송인 KBS를 제외하고 1위에 오를 정도였다.

○ 신방 겸영의 시너지 극대화

동아방송은 이전과는 다른 뉴스를 보도하면서 한국 방송을 ‘동아방송 이전과 이후로’ 구분지었다. 관급 보도와 ‘아나운서가 읽는 뉴스’라는 기존 방송의 한계를 넘어 동아일보 기자들이 직접 취재한 다양한 특종과 해설 프로그램을 보도했다. 특히 뉴스 해설에는 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 등 당대의 논객이 대거 참여해 다른 방송보다 한 차원 깊은 해설을 선보였다.

신문의 심층분석 기능을 방송에 적극 도입해 진행자가 주도적으로 방송을 이끄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 프로그램’을 처음 정착시키기도 했다. ‘라디오 석간’이 대표적인데, 이후 다른 방송사들이 유사 프로그램을 잇달아 신설했다.

동아방송은 ‘여명 80년’ ‘정계 야화’ ‘특별수사본부’ ‘이 사람을!’ 등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면서도 흥미와 긴장을 잃지 않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방송했다. ‘정계 야화’는 최근까지 방송된 지상파 정치 드라마의 원조 격이었다. ‘이 사람을!’은 세미다큐드라마라는 새 장르를 열면서 일본 NTV에서 판권 구입 요청을 받기도 했다.

동아방송의 오락프로그램은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첨단의 문화 조류를 시시각각 안방에 전달했다. 전영우 아나운서실장이 진행하던 ‘유쾌한 응접실’은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 등 전문가들을 스튜디오에 초대해 일상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낸 첫 토크쇼로 평가받고 있다.

○ 동아방송의 가치는 현재진행형

동아방송은 갑작스러운 강제 폐방 결정으로 인해 17년간 쌓은 콘텐츠 제작 역량과 방송 저널리즘을 체계적으로 물려줄 기회를 잃었다. 많은 사람이 동아방송의 폐방을 안타까워했던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하게 해주던 방송을 권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1964년 한국 방송 사상 처음으로 프로그램 때문에 방송인들이 구속된 ‘앵무새 사건’처럼, 정권에 대한 날카롭고 합리적인 비판을 방송에서 더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이는 이후 한국의 방송들이 편파 보도와 ‘저질드라마·오락’ 논란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현실과 크게 대조를 보이는 대목이다. 89년에 걸쳐 신문 저널리즘의 역량을 키워온 동아일보사는 강제로 단절된 동아방송의 미디어 가치를 계승하기 위한 발판을 다지고 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동아방송 일지

1963년 4월 25일 개국(콜사인 HLKJ), 최초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여명 80년’ 시작
1964년 5월 1일 방송캠페인의 효시 ‘걸어서 가자’ 시작
1964년 6월 4일 프로그램 앵무새가 반공법 등을 위반했다며 간부 6명 연행(15일 구속)
1964년 9월 19일 미도파백화점에 스튜디오 개설
1965년 9월 8일 조동화 제작과장, (정권 비판에 불만을 품은) 괴한에게 납치돼 구타당함
1966년 1월 25일 민간방송 첫 대북방송
1966년 11월 29일 앵무새 관련자 전원, 서울형사지법에서 무죄 판결
1971년 4월 15일 언론자유수호선언문 발표
1975년 1월 8일 방송광고 무더기 해약 사태
1979년 11월 14일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흡수통합 발표
1980년 11월 30일 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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