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468명 집단입국, 그 후 5년]<1> 끝나지 않은 유랑 목숨 건 탈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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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포대 찾아 떠난 17세 소녀, 대학생 됐지만 고단한 삶

노동자 - 농민 출신이 39%
대부분 수년간 中 도피생활
의사 등 부유층도 일부 탈출
“南 동경… 더 잘살고 싶었다”
20명은 북송됐다가 재탈출
“수용소 있다가는 죽었을것”

2004년 7월 28일 입국한 탈북자 가운데 한 명이 버스 안에서 ‘V’자를 그려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4년 7월 28일 입국한 탈북자 가운데 한 명이 버스 안에서 ‘V’자를 그려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에게 “쌀 한 포대만 이고 오겠소”라고 말한 뒤 무작정 길을 나섰다. 장마가 사흘째 계속되던 1996년 6월 28일 오후 10시경. 열일곱 살 소녀 정경미 씨(30·이하 모두 가명)는 두만강을 앞에 두고 멈칫했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물은 검어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돌아가야 하나.’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집이 있는 함경북도 회령시 쪽을 쳐다봤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굶어 죽었다.

정 씨 가족은 집이 5채밖에 없는 산골마을에서 살았다. 구릉을 밭으로 개간한 곳이었다. 5월 말이 돼야 얼음이 녹았고, 옥수수에 알이 익을 만하면 서리가 내렸다. 봄에 밭을 갈려고 하면 쟁기 날이 언 땅에 부딪쳐 ‘쩡’ 하고 튕겨 나왔다. 감자와 콩 농사를 지었지만 3300m²(1000평)당 수확량은 30kg이 안 됐다.

1994년 배급이 끊겼다. 부모를 잃은 ‘꽃제비(거지)’들이 길에 널렸다. 회령역사 안에서는 탈진한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갔다. 정 씨 가족은 부모님부터 어린 남동생까지 하루에 밀가루 한 숟가락씩을 먹고 버텼다. 밥조개버섯, 세투리(씀바귀) 등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는 풀도 가리지 않았다. 이가 풀에 물들어 파랗게 변색됐다.

정 씨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 투먼(圖們)으로 갔다. 2004년 7월 베트남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정 씨는 현재 한국에서 한 대학 중어중문학과에 다니다 휴학하고 학비를 벌고 있다.

○ 생계 곤란 탈북자가 다수

2004년 7월 27, 28일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468명은 정 씨처럼 식량난이나 생계 곤란으로 북-중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탈북자 200명 중에서는 여자 141명(70.5%), 남자 59명으로 나타나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여성들이 당국의 통제를 덜 받아 국경을 넘나들며 식량을 구하고 장사를 하거나, 기아에 시달리다 중국의 농촌 남성에게 팔려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납치당하는 탈북 여성도 상당수였다. 팔린 뒤 운이 좋아 탈북 여성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남자를 만나 순응하고 사는 사례도 있었다. 1998년 북한을 나온 김윤복 씨(48·여)는 잠시 묵었던 여관 주인에게 잡혀 중국 남자에게 6000위안(약 100만 원)에 팔렸다. 김 씨는 남자에게 북한에 있는 아들을 데려와 달라고 해 1년 만에 아들을 만났다. 김 씨는 “남자가 마음이 고왔다”고 말했다. 팔려간 여성들 대부분은 노동력과 성을 착취당했다. 김 씨는 “중국 공안에 신고했다가는 북송돼 수용소에 갇히고 때로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노동자 농민 무직자 등 많아

북한에서의 직업은 노동자가 50명(25%)으로 가장 많고, 농장일꾼이 28명(14%)으로 뒤를 이어 경제난에 타격을 받은 하층민이 주로 탈북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의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에 해당하는 ‘기관 직원’이 10명, ‘당 일꾼(당원)’이라고 답한 사람이 3명, 의사, 작가, 연구직, 교수도 각 1명이었다. 탈북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학력은 한국의 고교와 중학교를 합친 과정에 해당하는 고등중학교 졸업자가 104명(52%)으로 가장 많았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 굶주림에 지쳐 탈북한 사람들과 달리 2003, 2004년에는 ‘자유’나 ‘더 윤택한 생활’을 원해 탈북한 사람들이 많다. 현선혜 씨(38·여)는 탈북 1주일 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 1만7000여 명을 통틀어 입국 시기가 가장 빠른 축에 속한다. 집안이 여유가 있어 브로커 비용을 들고 탈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과 중국으로 해산물을 수출하는 ‘무역 일꾼’이었던 어머니가 몰래 숨겨온 한국 드라마나 외국 영화를 자주 접하며 자유를 동경했던 현 씨는 어머니를 졸라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필요한 돈을 지니고 고향을 떠났다. 김혜연 씨(29·여)도 인민학교 교원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생활하다가 “더 잘살고 싶어서” 2003년 탈북해 중국에서 장사를 하다 한국에 들어왔다.

정치적 불만 때문에 탈북한 사람도 많았다. 민병수 씨(33)는 “할아버지가 지주 출신이어서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며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토대가 나빠’ 대학에 가지 못했고 군대도 갈 수 없어 1994년 탈북했다”고 말했다.

○ 붙잡혀 북송, 수용소 생활, 탈출


탈북했다가 북송돼 ‘단련대’ ‘집결소’ 등 수용소에 갇힌 뒤 다시 탈출한 사람도 20명이었다. 농사를 짓던 황춘임 씨(33·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1999년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16km 길을 걸어 두만강을 건넜다. 농촌 마을에 팔려간 황 씨는 2004년 1월 공안에 붙잡혀 북송돼 수용소에 갇혔다. 2km를 걸어 밥을 날라 주던 어머니마저 조사를 받기 위해 수용소에 억류되자 굶는 수밖에 없었다. 이가 득실거리고 춥고 배고파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든 황 씨는 목숨을 걸고 수용소 담장을 넘었다.

임지선 씨(33·여)는 2003년 8월 남편 등 가족 6명과 함께 탈북했다.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시부모와 함께 공안에 붙잡혀 북송돼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임 씨는 혼자 아이를 낳았다. 임 씨는 남편의 소식을 모르는 채 핏덩이를 데리고 두 달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한국에 입국한 뒤 남편과 재회했다. 남편은 그해 5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특별취재팀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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