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살기 위해 비굴해졌을 뿐이고…”

  • 입력 2009년 2월 17일 02시 56분


■ 불황기 직장인 80% “비굴모드 경험”

예스 상사와 의견 달라도 무조건 끄덕

상사 썰렁한 유머에도 박장대소

“부장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가요”

중견 건설기업 총무팀 박모 차장(43)은 입사 동기와 함께 흡연실에서 직속 상사인 부장의 까다로운 성격을 성토했다. 동기 역시 맞장구를 치면서 이들은 신나게 ‘뒷 담화’를 했다.

그러던 중 대화의 주인공인 부장이 흡연실 문을 밀고 스윽 들어왔다.

이 동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부장에게 해맑게 웃음을 지으면서 허리를 굽혀 ‘배꼽 인사’를 했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부장님, 프레젠테이션이 정말 멋졌습니다. 역시 우리 회사는 부장님 없으면 안 돌아가요”라며 ‘아부성’ 발언으로 부장을 치켜세웠다.

박 차장은 “순간 동기에게 배신감이 들었지만 불황기에는 동기처럼 해야 살아남는다는 걸 깨달았다”며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사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상책”이라고 털어놨다.

최근 경기 불황으로 구조조정 압박이 확산되면서 직장인 5명 중 4명은 직장에서 ‘비굴 모드’로 지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정보업체인 인크루트는 리서치 전문기관인 엠브레인과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2일까지 전국 직장인 1075명을 대상으로 회사생활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0.1%가 ‘불황으로 직장에서 비굴하고 민망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는 대답을 했다고 16일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많았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김모 대리(34·영업직)는 토요일이자 밸런타인데이였던 14일 아내의 불만을 뒤로 하고 토요휴무를 반납한 뒤 출근했다. 그가 막상 사무실에서 한 일은 ‘웹 서핑’.

김 대리는 “목표 대비 달성률이 하위권이기 때문에 출근했는데 이날 나와 보니 휴일인데도 나처럼 출근한 직원이 여럿 있었다”며 “30대 초반부터 명예퇴직을 생각해야 한다는 ‘삼초땡 시대’라는데 나라고 집에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또 예전 같으면 반발했을 업무 지시나 자신과는 다른 의견에도 무조건 ‘예스’라고 맞장구치거나,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사항을 일일이 브리핑하는 것도 불황기에 살아남기 위한 직장인의 대표적인 ‘비굴 전략’으로 꼽혔다.

이 밖에 상사의 썰렁한 농담에 박장대소하면서 웃거나 상사의 자녀 및 부모의 선물까지 챙겨주는 것도 생존을 위한 비굴 사례로 거론됐다.

구조조정이 현실화한 회사의 경우에는 씁쓸한 비굴 전략도 적지 않았다.

자동차 부품 중소기업에 다니는 성모 차장(34)은 “월급이 밀리면 당장 사표를 내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이달부터 월급이 들어오지 않자 사표는커녕 매일 ‘언제 월급이 나오나’라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또 대기업에 다니는 장모 부장(55)은 “정규 인사에서 보직을 받지 못하는 등 간접적으로 회사를 나가라는 압박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버티고 있다”고 했다.

이광석 인크루트 대표는 “부도 등으로 형편이 어려워지는 기업이 속출하면서 직장인들도 평소보다 상사와의 관계나 업무 태도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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