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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던 멸치의 우리 이름

Posted March. 06, 2020 07:45,   

Updated March. 06, 2020 08:11

日本語

 “지리, 지가이리, 가이리, 가이리고바, 고바, 고주바, 주바, 오바.” 지난주 마트 건어물 진열대를 둘러보다 건조멸치 포장지에 시선이 고정되는 순간 언짢아졌다. 내친김에 진열된 건조멸치 상품명을 샅샅이 살폈다. 예외 없이 일본식 명칭이었다.

 몇 년 전에 권현망, 유자망, 양조망 등의 어선을 타고 다니며 한창 멸치어업을 조사할 때다. 멸치조업 하는 날 어선에 동승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해두었다. 며칠 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에 ‘오바잡이’가 있으니 부둣가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동문서답했다. 멸치잡이 선장이나 선원들을 만날 때면, 일본식 명칭을 쓰는 이유를 물었다. 한결 같은 대답이었다. “다들 그렇게 사용하니까.”

 멸치볶음과 멸치육수를 애용하는 아내에게 “가이리, 고바, 주바…”가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모른단다. 술자리에 마른멸치 안주가 나오면 동석한 사람들에게 물었다. 정확하게 아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소비자는 모르는 명칭을 어업조합, 수협, 유통업체 등에서 고집스럽게 사용한다. 원인은 10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포항, 울산, 거제, 통영, 여수, 고흥, 거문도 등 남해안을 중심으로 식민 이주어촌이 건설되면서 일본 어민들이 한반도 바다를 장악해 나갔다. 특히 거제도 등지에서 권현망으로 대대적인 멸치 어획이 이뤄졌다. 일본 어민 주도로 멸치 어로와 가공, 판매가 이뤄져 일본식 용어가 자리 잡았다.

 일부 왜곡돼 알려진 것처럼 멸치어업과 식문화가 전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유산은 아니다.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멸치를 먹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한 번 그물질로 배가 넘치는데 즉시 말리지 못해 썩으면 거름으로 사용했고, 마른멸치는 날마다 반찬으로 올렸다고 했다.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자산어보(玆山魚譜)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등에 마른멸치와 멸치젓갈을 먹은 기록이 있다. 

 건조멸치는 볶음용, 국물용 등 쓰임새로 나누거나, 길이에 따라 세멸, 자멸, 소멸, 중멸, 대멸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리(볶음용), 가이리(조림용), 주바(국물용)’ 등 일본 용어를 표기한 후 한국어는 괄호 속에 기재하고 있다. 누군가를 탓할 일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바꾸자는 것이다. 그동안 건조멸치에 부여된 창씨개명의 굴레를 누구도 벗겨주지 못했다. 광복 75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무심했다.

 최근 10년간 우리 해역에서 가장 많이 잡힌 물고기는 멸치다. 밑반찬은 물론이고 분말, 젓갈, 액젓 등 식탁에서 멸치의 위상을 넘는 생선을 찾기 어렵다. 위상에 맞는 대접을 해주자. 일본식 용어를 고집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건어물 진열장에서 ‘지리, 지가이리, 가이리, 가이리고바, 고바, 고주바, 주바, 오바’ 대신 우리말로 분류된 상품명을 보고 싶다. 제국주의 흔적이기에 무조건 지우자는 게 아니다. 일본에서조차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우리가 쥐고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 둘 것이 있고, 버릴 게 있다. 일본식 용어가 전파된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우리말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 언어에는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