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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출신 장용하 “독립위해 일어나라”...서울서 격문 인쇄해 배포

원주 출신 장용하 “독립위해 일어나라”...서울서 격문 인쇄해 배포

Posted June. 08, 2019 07:34,   

Updated June. 08, 2019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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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의 3·1운동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장용하(1900∼1978·사진)다.

 원주군 하동리(현재 원주시 학성동) 출신인 장용하가 3·1운동 때 전개한 독립운동은 비밀출판이었다. 서울에서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장용하는 3월 7일 ‘조선은 독립할 수 있으니 모두 분기하라’는 내용의 격문 20여 장을 탄산지에 등사해 시내에 뿌렸고, 3월 15일에는 ‘조선 민족은 자신(自信)을 먼저 세워라’라는 제목의 문서 20여 장을 등사해 배포했다.

 이어 ‘조선독립신문 제16호’(3월 28일) ‘반도의 목탁 제1호’(4월 1일) ‘반도의 목탁 제2호’(4월 12일)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4월 13일) ‘반도의 목탁 제3호’(4월 22일) ‘반도의 목탁 특별호’(4월 25일) 등의 유인물을 인쇄하고 서울의 가정에 배포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1974년 동아일보가 각계 원로들의 회고를 연재한 ‘편편야화’에서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김기진은 3·1운동 때 배재고보 동급생이었던 장용하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당시 비밀출판 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장용하 반장의 지시대로 3월 1일에 탑골공원에 가서 모든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날 밤부터 재동에 있는 장용하 반장의 하숙집으로 가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고 그 방에서 동지들과 함께 새우잠을 자고는 식전에 일어나는 길로 독립신문을 한 뭉치 품속에 감추어가지고 우리집으로 오면서 집집마다 대문 안으로 독립신문을 집어넣었다.”(동아일보 1974년 5월 23일자) 일본 경찰에 체포된 장용하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배재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 활동에 헌신했다. 



김지영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