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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 높은 민족의식 서로 공감했나… 부부인연 맺은 민족운동가들 많아

기개 높은 민족의식 서로 공감했나… 부부인연 맺은 민족운동가들 많아

Posted March. 16, 2019 08:05,   

Updated March. 16, 201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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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은 여학생들과 남성 민족운동가들을 부부로 맺어주기도 했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기개 높은 민족의식을 드러낸 여학생들이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던 남성 운동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재원 집합소’로 이름을 날리던 경성여고보 학생 김숙자(1892∼1979), 김원경(1898∼1981) 등이 대표적이다.

 김숙자 지사는 3·1운동 후 평안북도 영변으로 귀향해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20년 7월 언론인이자 국사학자인 장도빈(건국훈장 독립장)과 결혼했다. 김 지사의 아들인 장치혁 전 고합 회장(87)은 “당시 노총각인 아버지(33세)와 노처녀인 어머니(28세)가 결혼의 인연을 맺은 것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의 부친 김준찬은 광복군 사건으로 투옥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였고(동아일보 1925년 11월 12일), 그의 남동생 김응원은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의 책임자로 활약하며 조선총독부 대관(大官)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됐다(동아일보 1922년 3월 3일).

  ‘여학생 일기’의 주인공인 김원경은 1919년 4월 ‘조선독립애국부인회’ 및 ‘혈성단’ 대표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을 갔다가 독립운동가 최창식(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 결혼했다. 오성학교 교사 출신인 최창식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뒤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을 발행하는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김원경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숙명여학교 출신 박자혜 지사(1895∼1943)도 3·1운동을 인연으로 결혼까지 했다.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일하던 박 지사는 당시 일본 군경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학생들을 치료하면서 일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간호사들로 구성된 ‘간우회’를 조직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던 박 지사는 중국으로 망명해 단재 신채호(건국훈장 대통령장)를 만나 결혼까지 한다. 박 지사와 단재는 1920년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소개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영배 ojong@donga.com